등록 : 2016.10.06 10:34
수정 : 2016.10.06 11:17
옷은 신분을 증명하는 수단이다. 여벌의 옷을 갖기 어려웠던 시대에는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사회 계급을 파악하기가 아주 용이했다. 계절과 상황에 맞는 옷을 갖게 된 지금도 직업에 따라 적합한 옷은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 직장인 하면 양복 정장을 먼저 떠올린다. 요즘 양복을 입지 않는 직장인이 훨씬 많지만 우리의 인식은 ‘직장인→양복→사무직’, ‘노동자→점퍼’로 굳어져 있다.
정치인은? 남자 정치인은 대체로 흰 와이셔츠에 검정이나 짙고 어두운 색의 양복, 소속 정당의 로고 색깔에 맞춘 넥타이 정도가 무난하다. 이걸 어기면 엄청난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 당시 유시민 의원은 캐주얼 재킷에 베이지색 바지 차림으로 국회에 등원했다가 “품위가 없다”며 동료 의원들이 퇴장하는 통에 곤욕을 치렀다. 그 유명한 ‘빽바지 논쟁’이다. 그의 옷차림이 비난의 진짜 이유라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은 복장에 대한 감수성이 까다롭다고 하겠다.
정치인에게 옷은 이미지를 연출하는 수단이다. 선거철이면 재래시장에서 떡볶이나 국밥 등을 먹는데, 이때는 양복을 벗고 점퍼를 입는다. 그들은 친서민 행보라고 주장하나, 우리는 ‘서민 코스프레’로 받아들인다. 원래 코스프레는 영화, 만화, 게임 등에 등장하는 인물의 복장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종의 놀이로 ‘이 복장을 하는 동안 그 인물인 척함’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은 점퍼를 입고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 스스로를 서민이라 믿으며 우리에게도 믿어달라(혹은 속아달라)고 강변한다. 이때 놀이는 쇼로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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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동조 단식 때 문재인 전 대표(왼쪽)와 흰 셔츠 차림으로 단식을 시작한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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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은 아주 정치적인 행위인 만큼 옷차림도 중요하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한 유민 아빠 김영오씨는 아주 평범한 흰색 반팔 남방을 입었는데, 그리하여 자식 잃은 한국 중년 아비의 보편성을 획득했다. 그와 10일 동안 동조단식을 했던 문재인 전 민주당 대표는 대체로 파란 계열의 셔츠를 입었다. 특히 데님셔츠(청남방)와 노란 세월호 목걸이는 단식의 명분과 자신의 강건함을 효율적으로 어필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유난히 수난을 자주 당하는 듯한 이재명 성남시장도 정부의 지방재정 개편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하는 동안 대체로 파란 셔츠를 입었다. 파란색은 단식으로 인한 얼굴의 초췌함을 강조하며 고난을 겪는 이미지와 변치 않는 순결함을 부각시킨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의 단식은 7일 만에 끝났다. 당대표실에서 비공개로 시작된 무기한 단식 농성은 결연했고 인터넷에선 뜻밖의 지지성명이 쏟아졌다. 그러나 모든 언론이 집중하는 천금 같은 기회였던 단식 첫날,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색깔을 각인시킬 주요 요소인 옷 선택이 다소 아쉬웠다. 이 대표는 회색 점퍼에 흰 셔츠 차림이었는데, 너무 평범하여 그의 존재감이 부각되지 못했다. 그동안 새누리당은 대중들에게 비치는 이미지를 잘 연출해왔는데, 이번 이 대표의 단식 패션은 당과 자신 모두에게 꽤 비효율적이었다.
앞으로도 비슷한 갈등은 계속될 듯하니, 이정현 대표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혹시 단식을 하려는 새누리당 의원이 있다면 제안하고 싶은 옷차림이 있다. 일단 새누리당의 상징색인 빨간 셔츠나 점퍼를 입고, 흰 머리띠에 빨간 글씨로 주장하는 바를 써서 두르면 어떨까. 언론에 반복해서 노출된다면, 분명히 거야의 횡포에 고난받는 약자이자 피해자로 비칠 것이다. 단식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 무렵이 되면, 북핵 위협이 상존하는 국가적 위험 상황이니 군복이나 방상내피(일명 ‘깔깔이’)를 입고 대한민국의 안보를 걱정하는 정치 지도자의 면모를 드러낸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만약 비공개로 단식을 시작했다면, 이때 광화문 광장으로 장소를 옮겨 단식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아직까지 마땅한 친박 대선후보가 없는 새누리당과 보수층에서도 전국적인 관심을 받는 정치인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다. 단식 이유와 과정은 단식을 그만두면 곧 잊히기 마련이지만 빨간색과 군복을 입고 찍힌 사진은 그에게 크나큰 정치 밑천이 될 것이다. 이미지가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패션은 아주 정치적인 수단이다.
이동섭/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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