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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20 11:06 수정 : 2016.10.20 11:56

[ESC] 커버스토리
조상들 행적 기리려 세운 다양한 빗돌

강화도 전쟁박물관 앞에 모아놓은 선정비들. 금표비·사적비·하마비 등까지 67기의 빗돌이 있다.

흔한데다 생긴 꼴도 비슷해 그게 그것처럼 보이는 선정비들. 전국에 몇 기가 있는지 집계조차 안 돼 있고, 대부분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한 돌덩이들이다. 하지만 눈여겨보면 숱한 사연이 맺혀 있고, 저마다 서로 다른 빛깔로 빛나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닳아 희미해져 가는 글자들을 품고, 수백년 세월을 선 채로 견디는 선정비들을 찾아가 뚫어져라 들여다봤다.

“아마 선정비를 한자리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아닐까 합니다.”(강화전쟁박물관 해설사) 강화도 강화전쟁박물관 입구에 모아놓은 67기의 빗돌밭(강화비석군)은 작은 공동묘지를 떠올리게 한다. 16세기~20세기 초반 강화도에 세워진 강화유수·부사·판관·군수 들을 기리는 것들이다. 금표비·사적비·하마비 등 몇 기를 빼곤 60여 기가 선정비인데 찬찬히 살펴보니, 크기·모양·형식 등이 제각각이다. 빗돌 수가 많고, 비마다 설명판이 있어 시기·형태·내용별로 비교해 보기에 좋다.

강화유수 서필원 선정비(1707년)의 거북받침돌.
높이 1m 미만의 작은 것에서부터 2m를 넘는 것까지 있다. 4기의 대형 빗돌은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에 용무늬·구름무늬를 새겼다. 용무늬 머릿돌과 지붕돌로 덮은 몇 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대개 머릿돌 없이 위쪽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은, ‘갈’(碣)의 형태다(비석은 장방형의 비(碑)와 둥글게 다듬은 갈로 나뉘기도 한다). 총탄자국 선명한 것도 있고, 반 토막으로 잘린 것도 있다.

비 이름을 통해 주인공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다. 비 이름은 먼저 직함을 쓰고 성과 이름, 그리고 선정비·불망비로 끝나는 게 기본이다. 성 뒤에 붙는 ‘공’이나 ‘후’는 존칭이다. 대개는, 군수 아무개 선정비 또는 영세불망비 식으로 단순한데, 이름 뒤에 딸린 수식어 글자 수가 매우 긴 것들도 있다. 강화유수를 지낸 이시백의 비(1633년) 이름은 ‘강화유수 이공시백 지청지덕무휼군졸영세불망비’다. 딸린 글자가 13자로, ‘지극히 청렴하고 지극히 덕이 많으며 군졸에게 은혜를 베푼 이시백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내용이다. 역시 강화유수를 지낸 이안눌의 빗돌(1632년) 이름은 더 길다. ‘유수 이공안눌 빙청옥백은애장졸대개군영불망지비’다. ‘얼음처럼 청렴하고 옥처럼 결백하며 은혜와 사랑으로 장수와 병사를 다스려 군사를 크게 일으킨 이안눌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구석에 세워진, 반 토막으로 깨진 빗돌에 눈길이 간다. “선정비를 세우고 수령이 이임한 뒤에 지역민들이 깨뜨렸을 겁니다.”(해설사) 조선 후기로 가면서 학정을 일삼은 수령들까지 주민들 돈을 거둬 스스로 비석을 세우고 떠나는 일이 잦아진다. 분노한 주민들이 이를 그대로 뒀을 리 없다. 전국 빗돌 무리 중에 반 토막 난 것이 수두룩한 이유다.

분노한 백성들의 반격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곳이 정읍시 고부면의 선정비 무리다. 고부는 조선 말 포악한 군수 조병갑의 행태에 농민이 반기를 들며 동학농민운동이 발화한 곳이다. 고부면사무소 앞 연못 안의 정자 군자정 둘레에 늘어선, 군수·암행어사·병마절도사 등 22기의 선정비 무리는 한두 기를 빼곤 성한 게 없다. 반 토막으로 잘린 것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도 귀퉁이·옆구리가 깨진 모습이다. 학정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빗돌의 선정·청렴·애민 따위 미사여구는 분노의 표적이 됐을 것이다.

정읍 고부면 군자정 둘레의 반토막 난 선정비들. 22개 중 성한 것은 한두개 뿐이다.
정읍 고부면의 잘린 선정비들.

조병갑도 선정비를 남겼다. 이전에 군수로 부임했던 함양의 ‘상림 숲’ 안 ‘함양을 빛낸 역사인물 공원’이다. 존치 여부를 두고 논란이 뜨거웠으나, 반면교사로 삼자는 의미로 보전하기로 했다고 한다.

권력에 아부하려고 불망비를 세운 경우도 많다. 제주시 제주목관아 안의 빗돌 중에, 흥선대원군의 형 이최응을 기리는 영세불망비가 있다. 고종 때 제주목사 백낙연이 당시 영의정에 오른 실권자 이최응의 환심을 사려고 세운 것인데, 이최응이 피살되면서 백낙연은 오히려 벼슬길이 막혔다.

전국의 빗돌 무리 중엔 남다른 사연을 간직한 이색 비석도 많다. 강화비석군 속에 있는 금표비의 내용이 흥미롭다. 1733년 세워진 강화유수의 경고문인데,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100대, 재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라는 내용이다. 당시의 주거지 환경 문제를 짚어보게 해준다.

직함, 성, 존칭, 이름 순으로 쓰고
공적과 고마움 자세히 새기기도
‘셀프 선정비’, 아부용 불망비 수두룩
한글로 쓴 비석은 5개만 전해와

강화도의 금표비(1733년).
노비를 위해 세운 충노비는 함평·광주·진주 등 몇 곳에서 볼 수 있다. 함평 해보면 모평마을의 파평 윤씨 재실 옆 ‘열녀 신천강씨 정려’ 앞에는 노비 부부를 기리는 ‘충비 사월비, 충노 도생비’라 적힌 빗돌이 있다. 정유재란 때 왜적이 남편을 죽이려 하자 강씨가 막아서며 부부가 함께 숨지자, 고아가 된 두 아들을 노비 도생·사월 부부가 헌신적으로 키워낸 것을 기려 세운 빗돌이다. 주민 윤석률(81)씨는 “뒷날 그 둘째아들이 죽을 때 ‘내 제사 때 노비 부부도 함께 제사하라’는 유언을 해 지금도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함평 모평마을의 충노비. 노비 부부인 도생과 사월을 기려 세운 빗돌이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의로운 개’를 위해 세운 의견비·충견비도 임실·광주·원주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흥선대원군이 외세 배척을 내걸고 전국에 세운 척화비(斥和碑), 향교 등 들머리에 세워놓던 하마비(下馬碑)는 전국에 수두룩하다. 한글로 쓰인 조선시대 빗돌은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이윤탁 한글영비’(보물), 경북 문경의 ‘산불됴심비’ 등 5개만 남아 있다.

임실 ‘오수 의견비’와 의견상.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이윤탁 한글영비’(1536년·보물). 빗돌 옆면에 ‘비를 훼손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30자의 한글로 새겨져 있다.
영월엔 기생의 충절을 기려 세운 빗돌(기생고경춘비)과 시종·시녀순절비가 있고, 원주엔 꿈에 나타난 도깨비를 위해 세웠다는 선정비(개운동 김후선정지비)를 볼 수 있어 찾아볼 만하다.

김후선정지비는 신미양요(1871) 당시 강화 진무사(종2품)로 활약하고, 병마절도사(병사), 삼도 수군통제사 등을 지낸 정기원이란 이가 세웠다고 전해온다. 정기원이 어릴 때부터 글을 읽거나 무술을 연마하고 밤에 산책을 나가면 도깨비 같은 이가 나타나 “병사님 이제 오십니까” 하며 인사하더란다. 누구냐고 묻자 “김아무개올시다” 하고 사라졌는데, 뒷날 실제로 병사 직에 오른 정기원이 도깨비의 예언을 되새겨 이 비석을 세웠다는 얘기다. 그러나 최근 빗돌 뒷면에서 ‘가정(嘉靖)’(1522~1566년) 연호가 확인돼, 정기원보다 300여년 앞선 시대에 세워진 비석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주민들은 지금도 도깨비비로 믿고 부르길 좋아한다.

울산 동헌 뒤에 늘어선 30여기의 선정비 무리.
울산 학성공원엔 커다란 바위에 빗돌 모습으로 새긴 2기의 선정비(석)도 있다.

강화 정읍 함평 울산 등/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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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비석거리’ 많은 이유는

울산부사 노준명 청덕비(1652년)의 머릿돌.
돌을 다듬고 글씨를 새겨 세운 것이 빗돌(비석)이다. 주로 단단한 화강암에 글을 새겨 넣어, 마르고 닳도록 길이 후세에 전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돌이다. 삼국시대 영토 확장의 표석으로 세운 척경비·순수비에서부터 불교 고승들의 행적을 기려 세운 탑비, 무덤 앞의 묘비, 출중한 인물의 행적을 적은 사적비와 신도비, 선정을 베푼 지역 수령을 칭송한 선정비·불망비·공덕비, 그리고 열녀비·효자비까지, 종류도 많고 수량도 부지기수다.

이런 빗돌 중에서 가장 흔한, 그래서 주목받지 못하고 초라하게 방치돼온 비석이 바로 조선시대 중후반에 대거 등장한 선정비다. 요즘 군청·면사무소 마당이나 옛 관아 터, 공원 등의 한구석에 10~20기씩 모여 서서, 삐뚤빼뚤 키 재기를 하고 있는 유물이다. 도로건설·택지개발 등에 밀려,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훼손되거나 사라져버린 경우도 많았다. 전국에 허다한 ‘비석거리’란 지명이 대개 이런 빗돌이 세워져 있던 곳이다.

선정비(善政碑)는 세금을 감면하는 등 선정을 베풀고 이임하는 지역 수령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민이 감사의 뜻으로 세웠던 비석이다. 선정비 또는 불망비로 통칭해 부르는데, 영세불망비·애민비·청덕비·거사비·송덕비 등이 같은 계열의 비석이다. 주로 조선 중기부터 말기에 걸쳐 대량으로 세워졌는데, 그 형식과 깃든 사연이 흥미진진한 것들이 적지 않다. 조선 말로 접어들면서, 학정을 일삼은 수령들이 스스로 세운 선정비도 크게 늘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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