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커버스토리
타박타박 걷기 좋은 인천역~북성포구~만석동
|
북성포구 선착장 쪽에서 바라본 갯골. 매립이 예정돼 있는 곳이다.
|
인천역에서 시작해 북성포구를 거쳐 만석동 일대의 오래된 골목길, 그 골목 곳곳엔 서민들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마 떠나지 못한 채 터잡고 살아온 그들의 삶 속으로 걸어서 들어갔다.
인천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북성포구가 있다. 역 앞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고가차로 밑 도로와 철길을 건너 대한제분 방향으로 걸으면 북성포구를 가리키는 팻말이 나온다. 북성동과 만석동 경계지역에 놓인 포구다.
포구로 들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갯벌을 막은 시멘트 제방과 공장의 대형 철 구조물, 산더미처럼 쌓인 원목과 굴뚝 연기다. 여느 서남해안의 광활한 갯벌과 시골 포구 모습을 연상하고 찾아온 이라면, 포구답지도 않고 갯벌답지도 않은 풍경에 실망할 게 틀림없다. 하지만 항구도시 인천 시민들에겐 매립과 개발의 위기를 견디고 살아남은 옛 갯벌포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비록 시멘트 둑에 갇히긴 했어도, 물골을 따라 갈매기 떼 날고 백로들 오가며 먹잇감을 찾는 살아 있는 갯벌이 틀림없다. 제방을 따라 쌓인 그물더미와 선착장 주변에 멈춰선 어선 몇 척, 가건물에 마련된 해산물 좌판 등이 이곳이 고깃배가 드나드는 포구임을 드러낸다.
|
북성포구의 수산물 좌판.
|
끊임없이 연기를 뿜어내는 대형 공장 굴뚝들 너머로 펼쳐지는 노을은, 확실히 ‘세기말적’ 분위기를 드리운다. 저물녘 제방에서 만난 한 사진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내뿜어지는 굴뚝 연기와 구름더미, 공장의 불빛 등을 장노출로 담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북성포구 쪽 갯벌이 매립돼 제방이 만들어진 건 일제 강점기인 1930년 무렵이었다. 일제가 이곳에 대규모 수산물공판장과 어시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후 주변 갯벌이 차례로 매립되면서 십자 형태의 ‘십자굴’로 부르는 갯골이 형성됐다.
시멘트 둑 둘러싸인 북성포구선
물때 맞으면 ‘파시’ 구경도
피난민촌으로 시작된 만석동은
동일방직 등 노동운동 본산
재미있는 건 이 포구에서 아직도 어선들이 잡아온 고기를 배 위에서 흥정해 파는 파시가 열린다는 점이다. 물론 물때가 맞아야 펼쳐지는 풍경이다. 간혹 열리지 않는 때도 있다. 어선에서 옮겨진 해산물은 곧바로 제방 위 간이 좌판에서 판매된다. 한창때엔 어선 100여척이 모여들어 대규모 파시를 형성했다고 한다.
|
북성포구 수산물 좌판 시설에 붙어 있는 철거 계고문.
|
좌판 주변에서 ‘북성포구 갯벌 매립 계획’에 대한 주민의 찬반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좌판엔 전기도 안 들어오고 수도시설, 화장실조차 없다. 열악한 상태로 견뎌온 어민들을 위해 이제 널찍한 공간과 편의시설 확충이 필요하다.”(좌판 상인 이규형씨)
“갯벌 때문에 우리가 지금껏 먹고살아온 거다. 물길이 막히면 끝장이다. 그나마 오던 관광객도 끊길 것이다. 다른 포구 매립한 결과를 보라. 인천에서 갯벌은 이제 여기 하나 남았다. 절대 반대다.”(건어물 상인 이옥화씨)
듣고 보니 모두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 수십억원을 들여 ‘돌이킬 수 없는’ 매립을 하기보다는, 부둣가에 각종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주민들을 지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이곳에 화장실이 없는 건 아니다. 낡은 이동식 간이화장실이 하나 있다. 주민들은 이걸 ‘문고리 화장실’이라 부른다. “들어가서 그냥 앉아 있으면 클나요. 반드시 안에서 문고리를 꽉 잡아야 돼. 급한 사람이 확 열어젖히는 수가 있으니까.”(60대 주민) 낡아 문고리가 다 망가졌기 때문이다.
|
북성포구 횟집촌 입구.
|
갯벌 쪽으로 다릿발을 내려 지은 무허가 건물들이 이어지는 횟집촌 골목에서 지방 어촌의 허름한 먹자골목 풍경을 만난다. 여섯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제철 해산물을 즐기며 갯벌 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들이다. 물이 들었을 때와 빠졌을 때 풍경이 다르고, 낮과 밤 경관이 다르다. 밤에 물이 찼을 때 공장의 불빛과 굴뚝 연기가 물에 반사된 모습이 우울하면서도 편안한,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골목을 돌아 포구를 빠져나오면, 고가차도 밑에서 굴 좌판 10여곳이 모여 있는 ‘굴막’이 나타난다. 자연산 굴을 파는 소규모 좌판들이다. 본디 북성포구 위쪽 갯벌가에 있다가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옛날엔 시화·대부·영흥도 쪽에서 채취해 왔지만, 방조제가 생긴 뒤론 영종도에서 채취해 온다고 한다. 굽은 허리 더 구부려 호스로 굴 더미를 씻고 있던 할머니는 “황해도 정주에서 1·4 후퇴 때 내려와 정착했다”고 말했다.
이 일대는 황해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피난 내려와 판잣집을 짓고 살며 형성된 주거지다. 비좁은 골목으로 빼곡하게 지어진 낡고 비좁은 집들이 지금도 수두룩하다. 빈집이 많아 쓸쓸하고 적막한 골목, 낡은 문짝 틈에서 궁핍했던 시절 피난살이의 고단한 일상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듯하다.
|
만석동엔 혼자 걸어도 비좁게 느껴지는 골목들이 많다.
|
|
만석동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 공장.
|
인천에서 살아온 어르신들은 다 안다는 ‘똥마당’이 바로 이곳이다. 북성포구 옆 고가차도 주변을 가리키는 옛 별칭이다. 피난민들이 쓰던 공동화장실은 수거가 제대로 안 돼 언제나 똥이 가득 찬 상태였는데, 이마저 모자라 철로 주변에서 볼일을 보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인천 골목지킴이 이성진 회장은 “큰비라도 오면 이 일대와 갯벌까지 악취가 진동하는 똥바다를 이뤄 생긴 이름”이라고 했다.
만석동 일대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대형 공장이 즐비하다.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삼화제분·동아제분(현 동아원)·조선기계제작소 등이 대표적이다. 공장 건물과 창고, 일인들이 쓰던 간부 사택과 한국인 노동자들이 살던 비좁은 숙소가 곳곳에 남아 있다.
이성진 회장은 “이 지역이 한국 노동운동의 본산”이라고 했다. 일제 때 좌익 노동운동이 융성했고, 전쟁 뒤엔 우익 반공노조가 득세하다가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민주노조 운동이 격렬하게 벌어진 곳이다.
|
동일방직 인천공장 의무실. 1950년대 중반에 지은, 한·일 양식이 혼재된 건물이다.
|
1978년 민주노조 와해를 꾀한 중앙정보부의 ‘똥물 테러’ 사건이 벌어졌던 동일방직 인천공장 안, 1950년대 중반에 지어졌다는 의무실 건물이 눈길을 끈다. 지붕과 창, 벽 장식 등은 한국 전통식이고, 입구와 기둥, 실내 구조는 일본식이다. 동일방직에서 30년을 근무해온 임아무개(61)씨는 “직원이 200명이 넘던 15년 전쯤까지도 의무실로 사용됐던 곳”이라고 했다. 한창때 3000명이 넘던 동일방직 인천공장은 공장시설 대부분이 동남아로 옮겨지면서, 현재는 30명만 남아 있다. 의무실 건물 등 역사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공장 경비실에 문의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
인천/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