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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11 19:35 수정 : 2017.01.12 11:02

권용득

[ESC] 권용득의 살림

권용득
어린 시절 나의 불가사의는 피라미드나 유에프오(UFO)의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살림살이는 얼마 없었지만 언제나 깨끗한 우리 집이었다.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집안 곳곳을 곧잘 어질렀는데 다음날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또 매일 아침 갓 지은 밥과 보글보글 끓는 찌개나 국이 밥상에 올라왔다. 그건 오랫동안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내가 어지럽힌 걸 정돈하고, 집안을 청소하고,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널고, 다시 밥을 짓고, 쉴 틈 없는 집안일은 모두 어머니의 일이었다. 전업주부도 아니었는데 대체 이 많은 걸 언제 다 하셨지? 어린 내게 그것만큼 불가사의한 일도 없었다.

어머니가 과거에 했던 부업은 가짓수를 헤아리기 힘들다. 개당 10원짜리 전자부품 조립부터 타일 잘라 붙이기, 봉제인형에 솜 넣기, 도배와 장판까지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 하셨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동네 아이들에게 과외를 하다 공부방을 운영하게 됐는데 꽤 인기가 좋았다. 광고 전단지 한 번 돌린 적 없지만 지금까지 성업 중이라, 어머니는 고향의 사교육 업계에서는 꽤 독보적인 존재다. 하지만 어머니는 공부방을 운영하면서도 우유배달 같은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아버지가 회사의 노조활동을 포기하고 월급다운 월급을 받아 오셨을 때 어머니는 그제야 다른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공부방 운영에만 집중하셨다. 그 와중에도 집안일은 모두 어머니 몫이었고, 다음날 아침이면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나도 어느덧 우리 부모님처럼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불가사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돼도 권쥐(아들의 애칭)가 어지럽힌 건 그대로였고, 아침 밥상은 구경도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나는 어머니처럼 부지런하지 못했고, 쏭(아내의 애칭)은 어머니가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우리 집의 살림 원칙은 이 세 가지가 됐다. 최대한 방치할 것, 완벽하지 말 것, 집안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집안일에 관해 입 닥치고 있을 것(가령 반찬투정 금지). 물론 집안일 좀 했다고 지나치게 생색을 내서도 안 된다. 만약 이 원칙을 벗어날 경우에는 ‘탄핵’도 각오해야 한다. 또 이 세 가지 원칙 이전에 우리 집에는 헌법 1조 1항처럼 정통성을 정의하는 원칙 중의 원칙이 있다.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상대방도 하기 싫다.’

쏭과 나는 둘 다 살림에 관심이 없고, 집안일은 최대한 나누고 최대한 미뤘다. 과거의 어머니처럼 생계를 위해 돈이 되는 일은 마다하지 않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병행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집안일까지 꼼꼼히 돌보진 못했다. 그러기엔 하루가 너무 짧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결혼 초기 나는 내심 쏭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요구했다. 물론 말로 한 적은 없었지만, 쏭은 내 요구를 대번에 알아차렸고 보기 좋게 걷어찼다. 우리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인간이면서 동등한 욕망을 가졌다는 걸 미련스럽게 알아갔다. 작고 사소한 일에도 매번 부딪치며 어렵게 알아갔다. 말하자면 우리 집의 살림 원칙들은 서로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합의일 뿐이다.

나는 한때 언제나 깨끗한 우리 집을 불가사의하게 생각했으면서도 어머니의 희생은 당연한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침식사는 대충 때우는 게 당연하고, 물건마다 제자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언제나 깨끗한 우리 집’은 추억 속에만 존재한다. 부모님 사이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부모님 집에서도 아침밥상은 사라졌고, 청소와 장보기 정도는 아버지의 몫이 됐다. 어머니가 볼 땐 성에 찰 리 없겠지만, 적어도 내 유년의 불가사의는 조금씩 희미해지는 중이다. 이왕이면 그 불가사의가 대물림되지 않고 우리 세대에서 끝났으면 한다. 과거에 당연했던 일들이 지금은 당연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권쥐에게는 언제나 깨끗한 우리 집보다 피라미드나 유에프오의 존재 따위가 불가사의했으면 좋겠다.

권용득/만화가·<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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