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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29 10:12 수정 : 2017.01.29 10:16

[ESC] ㅋㅋㅋ+에세이
결혼에서 비롯된 관계의 무한확장, 그 당혹스러움

가족은 결혼을 통해 확장된다. 이 낯선 가족들은, 명절 때 만나 함께 어색한 시간을 보내며 진짜 가족이 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내일이면 드디어 명절 연휴의 시작이다. 지금 이 글을 고향 가는 기차 안에서 읽는 분도 있을 거고, 이미 고향에 도착해서 읽는 분도 있을 거고, 내일 고향 갈 생각에 신나서 읽는 분도, 고향 생각만 해도 귀찮고 골치 아파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읽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나의 신혼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뭔 엉뚱한 소리냐 싶겠지만, 명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나의 신혼여행지는 아일랜드였다. 영국 옆 섬나라, 아일랜드. 가는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들이 잘 안 가는 신혼여행지를 고른 죄로, 아일랜드에서 한국까지 오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우선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거기서부터는 싼 비행기표를 산 ‘죗값’을 치러야 했다. 런던에서 모스크바로, 그리고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겨우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아일랜드-런던-모스크바-인천. 그렇게 도착한 내 고국은 명절 이틀 전이었다.

처음 간 시백부댁 모르는 얼굴들
어색함에 설거지만 하다 다시
시이모할머니댁으로, 시고모댁으로…
100여명이 갑자기 ‘가족’이 됐다

공항에서 짐을 찾아 신혼집으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지도 않고 바로 샤워를 했다. ‘이게 몇 시간 만에 샤워지?’라며 따뜻한 물 아래에서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윈 없었다. 잠을 못 자 충혈된 눈에 렌즈를 집어넣고, 화장을 하고, 머리를 말리고, 깨끗한 옷을 꺼내 입고, 가방을 싸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인천공항에서 집에 도착한 지 4시간 만에 우리는 다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왜냐고? 인천공항에서 대구행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왜냐고? 친정이 있는 대구로 가는 기차표를 못 구했기 때문이다. 왜냐고? 결혼 준비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결혼 전에 명절 교통대란까지 예측하며 기차표를 구할 정신이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겨우겨우, 그것도 김포도 아니라 인천에서 대구로 가는 비행기표를 구했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나는 까무러치듯 잠들었다.

대구에 도착하니까 어둑어둑했다. 새벽인가? 밤인가? 잠에 취해 나는 정신이 없었다. 어찌어찌 친정집에 도착했더니 친척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2주 전 내 결혼식 때문에 울산까지 왔던 가족들이, 이번엔 집안에서 처음 결혼한 나와 나의 남편을 위해 또 우리 집에 모인 것이었다. 난 이상하게 그런 게 불편했다. 아니,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내가 뭐라고, 왜 나 때문에. 결혼식 때도 그런 감정이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감상에 오래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남편은 친척들의 성화에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며 남편도 생각했을 것이다. 난 누군가, 여긴 어딘가, 이분들은 누구인가.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명절 전날 나는 엄마가 바리바리 싸준 음식들을 들고 울산 시댁으로 갔다. 처음부터 조신한 며느리가 되어야 하나, 착한 며느리가 되어야 하나, 눈치 빠른 며느리가 되어야 하나, 천방지축 며느리가 되어야 하나 치밀하게 고민하고 싶었는데, 맘대로 되지 않았다. 누가 시댁이 어렵다고 했나? 그날 나에겐 ‘시댁’보다 어려운 게 ‘시차’였다. 하품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밥을 먹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티브이를 보다가도, 여행 이야기를 하다가도, 남편도, 나도, 에브리바디, 하암.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들어가서 낮잠 좀 자. 오늘은 우리끼리니까 편하게 있어. 내일은 좀 정신없을 거야.”

내일? 그렇다. 그 ‘내일’이 되었다. 명절 당일 아침. 새벽 5시에 알람이 울렸다. 벌떡 일어나서 씻고, 시부모님과 남편과 나는 버스를 탔다. 부산 큰댁으로 가는 시외버스. 버스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탔다. 종점부터 거의 종점까지. 명절 아침이라 택시가 없었다. 다시 버스를 탔다. 버스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 때마다 나는 남편을 쿡쿡 찔렀다. “거기야. 거기.” 수년 전부터 인터넷으로 보던 곳이었다. 부산 감천마을. 언덕 위에 형형색색의 집들이 들어서 있는 그 풍경이 너무 이국적이어서 꼭 카메라를 들고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곳이 내가 명절 때마다 와야 하는 곳이라니. 나는 좀 신났다. 그땐 그랬다.

하지만 천방지축 며느리 모드는 큰댁에 들어가자마자 사라졌다. 시아버지의 5남매와, 그들의 배우자,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그들의 사위들과 며느리들(그 며느리들 중 하나가 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 좁은 집 안 구석구석 모르는 얼굴들과 인사를 했다. 물론 나는 그들 모두가 헷갈렸다. 방법이 없었다. 부엌에서 유일하게 아는 얼굴, 시어머니 옆에 딱 붙어 있는 수밖에.

어색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설거지밖에 없었다. 유일하게 나와 같이 설거지를 하던 분이 셋째 큰아버님의 둘째 며느리라는 사실만 겨우 인지했다.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죠?” “네.” “저도 몇 년 걸렸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겨우 낯선 집의 싱크대와 친해질 만하니 일어나야 했다. 언덕 너머 할머니댁에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할머니? 어떤 할머니? 제대로 묻지도 못하고 높은 구두를 신고 시부모님을 따라 언덕을 넘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과, 한 명이 겨우 지나가는 골목길을 지나, 한 집에 도착했다. 그곳에도 수십명의 모르는 얼굴들이 있었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내 손을 잡았다. 시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버지랑 나랑 중매를 서신, 아버지의 이모님이셔.” 할머니는 연신 나를 쓰다듬으셨고, 나는 계속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남편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자매분이라…. 그야말로 사돈의 팔촌을 만난 기분이었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다시 언덕길을 걸어 내려와 고모님 댁으로 향했고…, 그 집 문을 열었더니 다시 또 수십명의 모르는 얼굴들이 튀어나왔고….

유난히 가족 관념이 희박한 내게, 그날 거의 백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나타났었다. 남편과 나만 있던, 겨우 2인분에 불과했던 ‘가족’이라는 단어가, 그날 처음 보는 얼굴들과 이름들과 뭐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는 먼 관계의 사람들까지로 엄청나게 멀리멀리 늘어났다. ‘누구시라고요?’ ‘가족입니다.’ ‘아, 저분은 또 누구인 걸까요?’ ‘역시, 가족입니다.’

아일랜드에서 런던으로, 모스크바로, 인천으로, 서울로. 다시 인천으로, 대구로, 울산으로, 그리고 부산으로 이어진 머나먼 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날, 내 머릿속의 ‘가족’이라는 단어는 그보다 더 멀리멀리 여행하고 돌아왔다는 것을.

몇 주 전, 나는 새벽 5시50분에 일어나서 컴퓨터를 켰다. 명절 기차표를 예매하려고 6시 정각을 기다려 미친 듯이 클릭을 했다. 나의 가장 불가해한 단어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그 가깝고도 먼 여행을 위해.

김민철/카피라이터·<모든 요일의 여행>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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