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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15 19:39 수정 : 2017.02.15 19:57

게티이미지뱅크

[ESC] Y기자, 내 인생은 시트콤

게티이미지뱅크
분명 그것은 전조였다. 눈을 뜨니 사방이 뿌옜다. 가습기가 고장이 났는지 방 안이 온통 습기를 머금고 있었다. 흡사 건식 사우나에 온 듯한 기분까지 들었다. 바깥도 사정은 비슷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이 안개가 자욱했다. 11월말에 안개라니! 그것도 결혼식 날에….

새벽 5시30분. 강남 미용실로 가려고 섭외한 차량도 안개 탓에 늦게 도착했다. ‘점점 걷히겠지’ 하는 희망을 갖고 미용실에서 화장을 하고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그때까지 어떤 하루를 보내게 될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삶은 가끔 이상한 심술을 부리니까.

전화가 한 통 왔다. 제주도였다.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연착될 것 같네.”

날벼락 같은 아빠의 말. 그렇다. 부모님은 그때 제주도에 계셨다. 결혼식 전날 제주도에서 결혼 피로연을 미리 하고 나와 신랑은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부모님은 늦게까지 동네 어르신들을 대접하느라 결혼식 당일 첫 비행기로 오기로 돼 있었다. 오빠네 가족이나 할머니를 비롯한 친척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비행기가 안 뜬다니. 11월의 안개가 제주도까지 덮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으레 있는 연발이라고 믿었다. 아빠도 “안개만 걷히면 바로 뜬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은 이미 다른 항공사의 첫 비행기로 왔다. 하지만 5분 차이로 부모님이 탈 비행기는 뜨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비행기를 탔다는 연락이 없었다.

대학 동문회관에서 올리는 결혼식 시간은 오전 11시. 오전 9시 즈음부터는 신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여전히 비행기는 뜨지 않았다. 오전 10시가 되자 신랑이나 나나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 조카가 교회(그날이 일요일이었다)에서 율동을 배우고 간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언니네 식구들까지 식장 도착이 늦었다. 하객들은 점점 들어차는데 정작 신부 쪽에서 인사를 받을 사람이 없었다. 내가 웨딩드레스 입고 식장 앞에서 인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제주공항에서도 나름 비상이었다. 항공사에 사정사정해서 겨우 비행기에 탑승한 시간이 오전 10시15분. 그게 안개가 걷히고 처음 뜬 비행기였다. 그나마 부모님과 오빠, 그리고 큰조카만 탈 수 있었다. 할머니와 올케를 비롯해 10여명의 친척들은 공항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발길을 돌렸다.

오전 11시 예식 시간이 임박하면서 식장 쪽도 난감해졌다. 다음 결혼식까지 2시간의 여유가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사회자가 축가라도 먼저 부르고 있자며 축가 예정자를 찾았다. 그날 축가는 남편이 부르기로 한 터. 피아노를 칠 후배와 함께 사흘 전 식장에서 연습까지 했던 남편은, 하객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느라 마이크를 잡을 틈이 없었다. 오전 11시30분. 식도 올리기 전에 하객들과 단체사진을 미리 찍었다. 식을 마치면 찍을 시간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오전 11시50분. 부모님이 겨우 도착했다. 엄마는 화장도 안 한 상태였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닥친다고, 예약했던 동네 미용실이 깜빡 잊고 문을 안 열었단다. 부모님을 보자마자 덜컥 눈물부터 났다. 사실 1시간 전부터 꽉 조인 웨딩드레스 때문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울고 싶은 상태였다.

낮 12시. 예정보다 1시간 늦게 결혼식을 치렀다. 다음 식을 위해서 10분 만에 후딱 해치웠다. 10분 중에 축사가 8분이었으니까 그냥 입장했다가 퇴장한 거나 다름없다. 번갯불에 콩 볶아 먹기. 딱 그 상황이었다. 결혼식 내내 엄마는 눈물만 흘렸고 아빠의 두 눈도 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그나마 신랑이 정신줄을 잡고 결혼식 내내 분위기를 이끌었다.

하늘길의 심술로 부모님 없이 치를 뻔했던 결혼식. 지금도 주위에선 ‘난리 부르스’였던 우리 결혼식을 절대 잊지 못하겠다고 한다. 진짜 결혼‘식’은 두 번 할 게 못 된다.

Y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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