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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2 19:40 수정 : 2017.02.23 18:39

권용득

[ESC] 권용득의 살림

권용득
친구 부부가 모처럼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친구 부부에게는 딸만 둘 있는데, 낯가림이 부쩍 심해진 둘째딸은 제 엄마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 이내 잠이 들었다. 큰 효도를 한 셈이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첫째딸은, 거실에서 아들 권쥐와 티브이 만화를 보고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거실과 티브이를 양보하고 주방 식탁에서 서로의 근황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을 살피러 갔던 아내 쏭이 권쥐를 야단치기 시작했다.

“강아지는 왜 남자고, 고양이는 왜 여자야?”

권쥐가 티브이 만화 속 고양이 캐릭터가 남자인 걸 문제 삼았던 모양이다. 권쥐는 강아지는 왠지 남자 같고, 고양이는 왠지 여자 같다고 대답했다. 쏭은 권쥐의 선입견에 말문이 막혔고, 나도 권쥐를 쉽게 이해시킬 만한 뾰족한 수가 없었다. 영화 <전우치>에서 개 역할을 맡았던 유해진이 실은 암캐였다고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권쥐는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마침 친구 부부의 둘째딸이 울면서 깨는 바람에 모처럼 만의 가족 모임은 아쉽게 끝이 났다.

그런데 권쥐는 대체 왜 강아지는 남자 같고, 또 고양이는 여자 같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로보카 폴리>라는 티브이 어린이 만화 시리즈였다. 변신로봇자동차 구조대의 활약을 그린 만화인데 주인공은 경찰차 폴리, 소방차 로이, 구조헬기 헬리, 응급차 엠버다. 폴리와 로이와 헬리는 남자아이 캐릭터였고, 엠버는 머리에 커다란 분홍색 리본을 달고 있어서 누가 보더라도 여자아이 캐릭터였다. 넷은 모두 구조 임무를 맡고 있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작고 큰 사고를 수습했다. 다만 엠버의 역할은 “용감하고 빠른” 폴리나 “누구보다 강한” 로이와 다를 바 없었지만, 주제가에서는 “상냥하고 똑똑한”으로 구분됐다. 또 늘 폴리와 로이와 헬리의 뒤치다꺼리를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마 기존의 어린이 만화 속 여자아이 캐릭터보다는 낫다고 해야 할까. 기존의 여자아이 캐릭터는 상냥하지만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기도 했고, 잔소리를 쏟아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또 여자아이 캐릭터는 친구들에게 요리해주는 걸 좋아하는 편인데, 적어도 엠버가 요리를 하겠다고 앞치마를 두른 적은 없었다.(자동차라서 그런가?)

만화 시리즈의 인기만큼 장난감의 인기도 높다. 개중에도 폴리와 로이가 가장 인기가 많았고 그다음이 헬리, 엠버 순이다. 마트에 갈 때마다 폴리와 로이는 거의 매번 품절 상태였고, 헬리도 없을 때가 많았다. 만화를 본 적은 없고 이름만 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손주에게 줄 선물로 어쩔 수 없이 엠버를 사 가기도 했다. 그럼 남자아이들은 엠버 말고 폴리를 사 달라며 땅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고, 권쥐도 한때 그랬다. 일부 여자아이들도 엠버보다 폴리나 로이를 더 좋아했다. 그건 만화의 전체적인 이야기가 대개 폴리 위주였고 로이 역시 엠버보다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만화를 보여주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어린이 만화가 아니더라도 성역할을 애써 구분하는 행위는 일상에서도 차고 넘친다.

“여자는 담배 피우는 거 아니래.”

권쥐가 어린이집을 다닐 때 했던 말이다.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 물었더니, 어린이집 선생님이 여자는 아이를 가져야 하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셨다고 했다. 나는 권쥐에게 담배가 피우고 싶으면 남자든 여자든 피울 수 있다고 얘기해줬다. 담배가 어린이와 청소년의 성장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정보도 빠뜨리지 않았다. 하지만 권쥐는 지금도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다소 혼란스러워한다.

문득 헬싱키에 갔을 때가 떠올랐다. 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가던 여성 두 분이 공터에 유모차를 세워 두고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는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고 충고를 하는 사람도 없었고,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도 그 여성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물론 흡연은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타인의 건강에도 해롭다. 그러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 성으로 역할을 구분 짓는 건 훨씬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타인을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차별 역시 폐암만큼 해로우니까 말이다. 또 사내놈들의 뒤치다꺼리에 지친 엠버가 어느 날 담배가 한 대 피우고 싶을지도 모르잖아? 우리 그 정도는 서로 내버려두자, 제발.

권용득 만화가·<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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