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22 20:20
수정 : 2017.03.22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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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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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권용득의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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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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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온 국민이 사건번호 ‘2016헌나1’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을 숨죽여 기다렸던 지난 10일, 이정미 전 헌법재판관의 헤어롤만큼이나 화제가 된 영상이 있었다.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인 로버트 켈리의 영국 공영방송 <비비시>(BBC) 화상통화 인터뷰는 그야말로 ‘방송사고’였다. 생방송 중에 난입해 흥겹게 어깨춤을 추는 여자아이와 보행기를 탄 갓난아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옴짝달싹 못하는 켈리 교수, 놀란 표정으로 들어와 아이들을 허겁지겁 끌고 나가는 동양인 여성.
순식간에 전세계로 퍼진 동영상에 등장한 켈리 교수 가족은 결과적으로 ‘깜짝 스타’가 됐다. 하지만 이 동영상은 성차별·인종차별·육아 등에 대한 많은 논란도 불러왔다. 외국의 여러 커뮤니티에서는 동영상 속 동양 여성을 ‘보모’라고 단정했다. 보모의 앞날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냐며 농담조의 걱정을 늘어놓기도 했고, 아빠의 방송 출연을 훼방 놓았던 아이들과 허둥대는 보모를 패러디한 동영상도 속속 등장했다. 몇몇 사람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그 여성을 보모라고 단정 짓느냐고 항의했다. 명백한 인종차별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재미로 주고받았던 댓글 속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항의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빈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그와 같은 반응은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양인 여성이 보모가 아닌, 아이들의 엄마로 밝혀진 뒤에도 논쟁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며 직관력을 뽐내기도 했다. ‘아이들이 혼혈아로 보이지 않았고, 남자는 넥타이까지 갖춰 맸는 데 반해 여자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또 백인 가정에서 보모는 대개 중남미 출신이거나 동양인이니까 내가 엄마를 보모로 오해했던 건 합리적 추론의 결과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로버트 켈리 교수는 가족과 함께 <비비시>와 일종의 해명 인터뷰를 다시 했다. 첫 번째 인터뷰와 달리 로버트 켈리 교수 가족은 모두 공평하게 평상복 차림이었다. 진행자는 그들의 동영상 덕분에 여러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걸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아이들의 엄마 김정아씨는 웃으며 말했다. “논쟁은 그만했으면 한다. 즐겁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보모가 아니다. 그게 진실이다.”
김정아씨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웃지 못했다. 아이들이 아빠보다 엄마에게 의존적인 걸 재차 문제 삼았고, 남편의 뒤치다꺼리로 분주했던 여성의 이미지가 우스갯거리로 소비되는 걸 불편해했다. 그리고 꽤 다수의 사람들은 이 논쟁의 시작이 그 불편해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웃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프로불편러’라는 조롱도 아끼지 않았다. 자신들의 선입견과 섣부른 판단을 탓하진 않았다.
공교롭게도 나를 포함한 다수의 국민이 마땅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헌재의 만장일치 결정 역시 불편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노년층이었다. 전쟁과 분단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고, 과거 군사독재정권의 ‘반공이념’을 신앙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있다. 헌재의 판결이 있던 날, 그들은 그들이 ‘빨갱이’라 부르며 혐오했던 과격한 방식의 시위도 서슴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모처럼의 축제 같은 분위기를 망가뜨린 ‘프로불편러’들인 셈이다.
헌재의 결정에 끝내 승복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한 다문화가정의 국제적 해프닝에도 웃지 못했던 사람들이 같은 ‘프로불편러’라는 얘기는 아니다. 전자는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마저 불편한 사람들이고, 후자는 일상 속의 다양한 차별이 불편한 사람들이다. 서로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지금은 소수지만 한때 다수였던 전자의 사람들이 ‘빨갱이’를 혐오했던 것처럼, 우리(다수)는 후자의 사람들을 ‘프로불편러’라며 혐오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무리 맞는 얘기라도 누구든 불편할 자유가 있다. 또한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빌 자유도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배척해도 괜찮다면, 그건 우리가 지난겨울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더 소란스러워져야 한다.
권용득/만화가·<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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