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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한옥마을. ‘옥인동 윤씨 가옥’에서 한복을 빌려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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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여행
‘걷고 싶은 문화예술길’로 거듭난 서울 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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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한옥마을. ‘옥인동 윤씨 가옥’에서 한복을 빌려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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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동(筆洞)은 서울 남산 북쪽자락 마을이다. 조선시대 남부(南部) 관아가 있어 부동(部洞)·부골이었는데 이것이 붓골로 불리다 한자로 적으며 필동이 됐다. 이름에 걸맞게 붓 다루는 게 일인 선비들이 많이 살던 곳이다. ‘꼬장꼬장한 선비’를 가리키는 ‘남산골샌님’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이 필동을 포함한 충무로는 영화·출판·인쇄·광고·제지업체들이 밀집해 있어 ‘문화예술 거리’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10여년 전 관련 업체·단체들이 파주출판단지 등 각지로 흩어진 뒤 이곳은 쇠락해가는 추억의 거리로 남았다.
이랬던 필동 일대가 최근 다시 주목받는 도심 골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식당·술집·카페 즐비한 필동 뒷골목이 ‘문화예술 전시장’으로 거듭나면서 탐방객 발길이 크게 늘고 있다. 지난해 ‘거리 미술관’을 만들면서 무수한 조형물이 선을 보였고, 올해 들어선 한옥을 주제로 한 걷기 좋은 거리를 조성하는 ‘보행 친화거리 공사’가 시작됐다. 필동 골목이 명소로 다시 태어나려고 꿈틀거린다.
대로변에서 뒷골목까지, 남산골 필동을 한바퀴 돌며 볼거리를 뒤적였다.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에서 출발해, 복합문화예술공간 예술통의 ‘거리 미술관’과 남산골한옥마을을 거쳐 산동네 골목을 돌며 필동의 과거와 오늘을 만나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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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남’ 조형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탐방객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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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지하 1층에 자리한 충무로영상센터 ‘오! 재미동’을 들여다본다. 역내의 긴 자투리 공간을 활용해 70m 길이로 꾸민 무료 문화예술 전시·창작 지원 공간이다. 5개의 디브이디(DVD) 방에서 영화 관람을 할 수 있고, 영화·만화·문학 서적도 찾아 읽을 수 있다. 영화 편집이 가능한 작업실도 갖췄다. 데이트하는 젊은층도 보이고, 피시(PC)를 들여다보는 어르신들 모습도 보인다. 남녀노소의 휴식 공간이다.
4번 출구로 나와 ‘컨테이너 미술관’을 감상한다. 대로변에 작은 컨테이너를 ‘부려놓은’ 듯 설치한 조형물이다. 이 일대 8개의 거리 미술관 중 하나다. 골목 안으로 들면 ‘거리 미술관’의 거점이라 할 수 있는 ‘예술통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 복합문화예술 공간 ‘예술통’ 안내사무실과 70석 규모의 공연장인 코쿤홀, 도예전시장·강연장 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주변에서부터 남산골한옥마을까지 8개의 ‘스트리트 뮤지엄’과 13점의 ‘마이크로 뮤지엄’ 등 30여점의 크고 작은 예술작품이 설치돼 있다. 모두 골목의 자투리 공간, 쓰레기가 쌓여 있던 구석진 땅을 이용한 것들이다. 골목 전체가 ‘열린 미술관’이라 할 만하다.
충무로역~한옥마을 일대
예술작품 30여점 설치
윤택영 재실·이승업 가옥 등
조선 최상류층 살림 볼거리
“무심코 봐선 안 보이는데, 찬찬히 보니 보석 같은 작품들이 곳곳에 있네요.” 대학 동창모임을 겸해 구경 왔다는 50대 여성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거리를 걸으며 하나하나 작품을 찾아내며 즐기는 표정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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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사의 안내로 필동 ‘거리 미술관’을 둘러보는 탐방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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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우직하게 생긴 퉁퉁한 몸집의 남성 조형물이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거나, 꽃다발을 들고 ‘차도녀’(맞은편에 있는 작품명)를 기다리거나, 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다. 조각가 김원근씨가 만든 5점의 ‘순정남’ 시리즈다. 조폭들 같기도 하지만, 머뭇거리는 듯한 자세와 눈초리 등이 보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마이크로 뮤지엄’은 재떨이처럼 세워놓은 작은 철제 통들로, 그야말로 초미니 미술관이다. ‘풍경’ 주제의 미디어아트 영상이 들여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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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미술관’ 둥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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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통 안내소 옆 도예전시관 건물은 조선시대 ‘4부 학당’(동·서·남·중부 네 곳에 설치됐던 중등교육기관)의 하나인 남부학당 터다. 건물 철거 중에 발견된 옛 한옥의 들보·서까래 등을 2층 천장에 재현해 놓았다. 옛 한옥 천장은, 눈물 흘리는 파란 코끼리 조형물이 올라앉은 맥줏집 ‘펍충무로’ 안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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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8개의 ‘거리 미술관’ 중 하나인 둥지 옆에 세워진 ‘차도녀’ 조형물, (오른쪽)필동 펍충무로 옥상엔 눈물 흘리는 푸른 코끼리가 있다. 넥타이를 매고 변기에 앉은 모습이다. 직장인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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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로 가는 길목에서 ‘거리 미술관’의 하나인 ‘ㅂㅂㅂㅂ 벽’을 만난다. 철제 벽 일부를 투명하게 장식해, 벽이면서도 내부를 드러내 보여주는 ‘소통의 벽’이다.
남산골한옥마을로 오른다. 외국 관광객이 꽤 보이지만, 중국인 관광객은 별로 없다. 주차장 관리인이 말했다. “아이구, 얼마 전까지 중국인들이 길에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왔었어요.” 사드 배치에 따른 중국 관광객 급감 현상이 실감난다. “그래도, 중국인 안 오니 살 것 같네그랴.” 이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쓰레기 천지, 담배꽁초 천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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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골한옥마을 ‘윤택영 재실’ 안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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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도방위사령부 터에 조성한 한옥마을의 가장 큰 볼거리는 ‘윤택영 재실’, ‘도편수 이승업 가옥’ 등 5채의 한옥이다. 조선시대 사대부 최상류층의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해준다. 서울 각지에 있던 것을 옮겨 복원해 놓았다. ‘윤택영 재실’ 안채에선 요일별로 서예·사군자 등 ‘남산골 서당’이 진행된다. 한옥마을 안에도 우물·이음·골목길 등 3개의 ‘거리 미술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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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에서 한복을 빌려 입은 탐방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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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국악당을 거쳐 ‘일석 이희승 선생 학덕 추모비’로 간다. ‘딸깍발이’, ‘남산골샌님’으로 불린 국어학자 이희승(1896~1989) 선생을 기리는 빗돌이다. 수필 <딸깍발이>를 통해 지조를 지키며 꼿꼿하게 살았던 조선 선비의 정신을 일깨워준 이다. 서울 정도 600년 기념으로 1994년 설치한 ‘천년 타임캡슐’도 있다. 서기 2394년 11월에 개봉한다니 그때 가서 들여다보기로 하고, 한옥마을 뒷문을 나서 필동 윗동네 골목으로 들어섰다.
남산 북쪽자락 깊숙이 파고든 필동의 윗동네다. 지은 지 30~40년은 됨직한 양옥 주택들 사이로 제지·제본 업체, 옛 일본식 가옥 흔적이 남은 낡은 집이 여기저기 나타난다. 간판도 없는 담뱃가게 할머니가 “커피 한잔 타 줄까?” 하신다. 담배·음료수·술과 과자·라면이 전부인 구멍가게 주인. 대화 상대가 필요하신 게다. 믹스커피 한잔을 얻어 마시며 “독립운동가의 딸”이라는 남승월(81)씨의 말씀을 들었다. 네댓 살 때 아버지를 따라가 중국 하얼빈 살던 얘기부터, 골목길 포장이 안 돼 오르내리기 힘들었던 30~40년 전 얘기까지, 옛이야기들이 끝이 없이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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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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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보호수)를 들여다보고, 남산족구장 쪽으로 올랐다. 한국전쟁 직후 전쟁고아를 수용했던 고아원이 있던 곳이다. 고아원 터엔 빌라들이 들어서 있고, 산자락에 당시 세운 것으로 보이는 ‘서로 사랑하자’라고 쓰인 빗돌 하나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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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장에서 만난 주민 김성회(64)씨는 “어렸을 때 고아원 창고에서 깡통분유를 훔쳐 먹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씨는 전쟁고아들이 60~70대 할아버지가 되어 찾아와, 길을 물어보는 경우도 여러 번 있었다고 했다.
족구장 자리는 1840년 헌종 때 세도가였던 조만영이 세운 정자가 있던 곳이다. 이 정자에서 갑오개혁 논의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연합유통 건물 뒤 바위벽엔 각석시문이 있다. 마모돼 잘 보이지 않으나, 영조 때 학자 녹옹 조현명(1690~1752)의 시라고 한다.
[%%IMAGE12%%] 내려와 필동삼거리 쪽으로 걷는다. 필동공영주차장 뒤 라비두스 예식장으로 간다. 부챗살처럼 퍼진 나뭇가지들에 까치집 세개를 들인 거대한 느티나무가 기다린다. 보호수로 지정되지 않은, 600년 됐다는 거목이다.
다시 젊은층 붐비는, 식당·술집·카페 즐비한 번화한 골목에 닿는다. 옛 선비들이 살던 집들은 표석으로만 남아 있다. 예식장 겸 식당인 한국의집 들머리에 박팽년 집터 표석이, 충무로 대로변 주유소 앞엔 유성룡 집터 표석이 세워져 있다.
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필동 골목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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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곳 필동 일대엔 내로라하는 맛집들이 많다. 필동면옥의 평양냉면, 백암왕순대국의 순대국, 필동식의 더덕정식 등 한식, 반반국수의 제주도식 국수, 필동해물의 해물안주, 펍충무로의 돼지바비큐와 생맥주 등. 이태리식당·파스타마켓·치아바타몽스 등 이탈리아 식당도 많다.
예술통 탐방 5명 이상이 3일 전에 예약하면 해설사의 안내로 거리 미술관 투어를 할 수 있다. 8개의 미술관을 둘러본 뒤 지도에 스탬프를 찍어 오면 삼거리 주변의 카페 ‘B24’에서 커피 한 잔을, 한식당 필동식에서 식사 때 와인 한 잔을, 펍충무로에선 생맥주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한다.
여행문의 서울 중구청 (02)3396-4114, 필동주민센터 (02)3396-6590, 중구문화원 (02)775-3001, 필동문화예술복합공간 예술통 (02)2276-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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