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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05 20:32 수정 : 2017.04.05 23:30

[ESC] 스타일
패션 저널리스트 홍석우의 ‘2017년 가을/겨울 헤라 서울패션위크’ 현장 참관기

‘2017 가을/겨울 헤라 서울패션위크’서 선보인 푸시버튼의 콜렉션. ‘2017 가을/겨울 헤라 서울패션위크’ 제공
올가을과 겨울 패션 흐름을 미리 보는 ‘2017년 가을/겨울 헤라 서울패션위크’가 3월24일부터 4월1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렸다. 젊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데뷔 컬렉션을 선보이는 신진 디자이너 양성 프로그램 ‘제너레이션 넥스트’부터, 패션위크를 보러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찾지 않은 이들도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참여 행사까지, 시민들의 축제가 되도록 힘을 쏟은 인상이었다.

패션 디자이너에게 컬렉션은 일종의 종합 연출이다. 무대 장식과 동선, 모델 선정은 물론 가장 중요한 옷의 소재와 디자인을 결정하고 컬렉션 주제를 함축해서 보여줘야 하는 ‘10분의 마법’이자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브’의 디자이너 이광호는 탄탄한 국내 내셔널 브랜드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옷을 짓는다. 2017년도 가을·겨울 시즌 아브가 택한 주제는 ‘거울 속 남자’가 사는 세상이다. 검정과 회색 같은 아브의 대표적 색상부터 방점을 찍은 빨강과 미려한 여성복을 담아낸 남색이 아브의 팔레트에 담겼다. 아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밀리터리 디테일의 정수만 남긴 검정 야전 재킷에 슬며시 보이는 남색 울 소재 안감은 아브 컬렉션에서 꼽은 최고의 한 벌이었다.

‘제너레이션 넥스트’ 출신으로 서울 컬렉션 무대로 자리를 옮긴 ‘무율’의 디자이너 최무열은 이제 막 이십대 중반을 넘어가는 젊은 디자이너다. 무율은 오래된 역사나 전통 문화와 그의 나이보다 깊은 특정 현대 문화의 아카이브, 그리고 현재 우리 주위에 퍼진 형상을 자연스럽고 매력적으로 혼합한다. 반다나 셔츠를 질끈 허리에 묶고 걸친 검정과 붉은색 줄무늬 티셔츠부터 한국 전통 자개장에서 영감을 받은 ‘블루종’과 ‘카고바지’ 또한 탁월한 한국식 스트리트 웨어였다.

젊은 신진 패션 디자이너들
데뷔 컬렉션 다채롭게 선봬
‘오버사이즈’ 열풍 다소 주춤
‘밀리터리’ 코트·점퍼도 인기

구연정과 최진우가 만드는 ‘제이쿠 컬렉션’의 주제는 현대 밀리터리 복식의 중심과 다름없는 ‘트렌치코트’의 변형이었다. 특유의 여밈 벨트를 가슴까지 올리고, 주위를 섬세한 주름 장식으로 마무리한 검은색 비대칭 트렌치코트는 연달아 등장한 검정 재킷 속 반투명 트렌치코트와 부드럽게 연결했다. 볼레로처럼 짧게 지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는 몸통을 없앤 대신 벨트 장식을 치마처럼 둘렀다. 그 안에 걸친 붉은 치마와 셔츠는 무대에서 보는 옷이 아닌, 직접 구매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섬세한 스타일링의 성취였다.

디자이너 계한희가 선보인 2017년도 가을·겨울 ‘카이’ 컬렉션은 강하고 과시하는 패션이 아닌 일종의 ‘덜어낸’ 무대처럼 보였다. 특유의 ‘카이’ 그래픽 스웨트셔츠 상·하의에는 미세한 주름 장식을 넣었다. 이미 너무 많은 스웨트셔츠가 나온 세상에 질린 안목 높은 바이어들이라면 주목할 것이다.

1 안티매터. 2 아브. 3 제이쿠. 4 카이. 5 무율. 6 푸시버튼. 7 ‘2017 가을/겨울 헤라 서울패션위크’에서 열린 푸시버튼의 컬렉션.
특히 이번 컬렉션에서 눈여겨본 점은 ‘기본적인’ 패션 아이템이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옷의 종류를 논하자면 카이 오리지널 ‘달러’ 패턴 새틴 셔츠부터 연분홍 ‘스마일’ 치마까지 다양했지만, 모든 옷이 대번에 ‘카이’임을 알 수 있었다. 패스트 패션과 럭셔리 패션 하우스가 사실 한 판의 피자를 놓고 경쟁하는 요즘, 자신 있는 분야에 집중해 완성도에 신경 쓴 컬렉션이었다.

‘푸시버튼’의 디자이너 박승건은 남성 디자이너이지만 여성들이 열광하는 낭만주의를 이해한다. 허리선이 쏙 들어간 소매가 둥근 녹색 울 재킷이나, 반세기 전 이미 전설이 된 패션 디자이너들을 향한 헌사로 느껴진 분홍빛 치마 슈트는 따분한 일상과 분리한 하루를 보내고 싶을 때 제격이다. 이는 곧 고전적인 패션과 이른바 ‘도시 스트리트 웨어’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것을 흡수하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것이 없는 시대의 거리와 일상에서 만난 다른 취향들을 스포이트의 물방울처럼 조금씩 담아낸다. 이를 푸시 버튼의 우산 아래 새로이 펼쳐내면, 비로소 서울 패션의 새로운 룩이 하나 더 탄생한다.

디자이너 홍혜진의 ‘더 스튜디오 케이’는 옷깃을 꼭 여밀 정도로 추운 계절이 사라진 계절 감각을 반영한 홑겹 울 트렌치코트를 컬렉션의 중심이자, 다가올 시즌의 키 아이템으로 내세웠다. 어깨와 소매를 타고 흘러내리는 끈 장식은 움직이는 모델들의 동작에 맞춰 경쾌하게 찰랑댔다. 남색 점선 무늬 코트의 연분홍색 끈 장식처럼, 서로 대비하며 어울리는 조화는 탁월했다.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마음에 든 점은 바로 ‘실루엣’이다. 애초에 커다란 치수의 옷을 좋아하고 즐겨 입는 편이지만, 광장에 모인 많은 이들이 엇비슷한 그래픽과 실루엣으로 점철한 모습에 피로감을 느끼곤 한다. 솔직히 이 거대한 유행은 컬렉션장 안에 들어왔다고 해서 가시지 않는다. ‘더 스튜디오 케이’ 컬렉션이 좋았던 점이 여기 있다. 가느다란 실루엣의 샛노란 셔츠 소매 끄트머리가 살짝 손등을 덮고, 독한 술보다는 조금 쓴 에스프레소가 어울리는 단정한 코트는 고루한 유행의 대척점에 있으면서 동시대적이었다.

거리 청소년들과 스케이트보더들로부터 출발한 그래픽과 티셔츠, 청바지 등에 영감을 얻은 스트리트 웨어의 득세는 몇 시즌이 지난 지금 여전히 강세를 이룬다. 반대로 고급 기성복, 즉 하이패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과거로의 탐험’ 또한 새로운 흐름으로 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연상하게 하는 ‘밀리터리’ 요소를 빌린 트렌치코트와 ‘MA-1’ 항공점퍼도 인기였다. 지난해 하반기를 휩쓴 ‘오버사이즈’ 열풍은 올해도 지속됐다. 수많은 디자이너의 무대에 치렁치렁한 소매의 가죽 재킷과 긴소매 티셔츠가 올라왔다. 하지만 빈도만 놓고 보면 확실히 줄었다. 마치 반작용처럼, 되레 ‘오버사이즈’ 요소를 배제한 디자이너도 더러 있었다.

몇년 전 서울패션위크에 관한 글을 <한겨레>에 기고하며 더 전문가·관계자들을 위한 행사로 갈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패션학도를 위한 열린 축제로 만들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이제 양쪽 중 하나만을 ‘정답’으로 말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 필자는 시민을 위한 축제로 가는 방향에 회의적이었지만, 이번 컬렉션을 보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제 패션위크를 단지 ‘거대한 오프라인 행사’로 취급해선 안 된다. 모바일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의 패션은 점점 더 작은 스마트폰 화면 안으로 들어간다. 반대로 이제 기성 매체를 넘어 사람들의 삶 그 자체가 된 듯 보이는 사회관계망서비스 역시 점점 더 사람들의 생활 반경과 오프라인의 현실로 들어선다. 요즘 사람들은 이 둘을 따로 떼어내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서울패션위크를 해시태그로 담은 수많은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시라).

지금 서울패션위크가 처한 과정은 이러한 변화 위에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도록 ‘패션’을 하나의 영화제 같은 시민 문화로 만든다. 더 많은 이가 화두로 삼도록 국내외 기업의 후원을 받고, 더 심도 있는 논의와 비즈니스가 컬렉션장 안에서 이뤄지도록 힘쓰는 시스템 정비도 이뤄져야 한다. 대폭 늘어난 시민 참여 행사는 기획 단계부터 사용자 경험까지 포괄적으로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

아직 경제 한파는 가실 기미를 보이지 않지만, 이번 서울패션위크 기간 중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안에 다양한 부대시설과 행사를 운영한 건 결과적으로 좋은 징조였다. 현재 패션계는 겉보기보다 내실이 아쉬울 때가 더러 있는데, 더 큰 시스템과 자본을 갖춘 기업들이 서울패션위크의 패션 디자이너들과 협업 프로젝트를 선보이는 건 양쪽 모두에게 좋은 기회일 테니 말이다. 기업과 민관 단체, 패션 브랜드와 이제 막 디자이너의 꿈을 이룩한 패션 디자이너들 모두에게 이로운 한걸음이 되길 바란다.

홍석우 패션 저널리스트·<더 네이비 매거진>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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