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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4.19 19:56 수정 : 2017.04.19 21:01

[ESC] 권용득의 살림

아들 권쥐가 욕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총 열 번의 ‘시발’을 사용했고, 며칠 전에도 두 번의 ‘시발’을 가까스로 참았다고 했다. 그놈의 ‘시발’은 매번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튀어나온다고 했다. 앳된 얼굴로 입에 욕을 달고 다니던 아이들이 영영 남의 집 아이들일 줄 알았는데, 나 이거 참.

그런데 나는 아이들 입에서 그 욕보다 더 무시무시한 말도 들은 적이 있다. 한번은 우울한 표정으로 동네 공원 미끄럼틀 위에 앉아 있는 한 아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서로 데면데면했지만, 가벼운 인사 정도는 주고받는 사이여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마치 아이엠에프(IMF) 때 실직한 중년 가장처럼 말했다. “사는 게 지옥 같네요.”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물었다. 아이는 말했다. “숙제가 너무 많아요. 학원도 정말 가기 싫고, 놀 시간이 없어요.”

아이는 학원 가는 길 미끄럼틀 위에 잠시 주저앉았던 셈이었다. 학교 근처나 동네 공원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렇게 발길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이 꽤 있다. 더 놀고 싶지만, 안타까운 눈빛으로 힘없이 돌아서는 아이들도 있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허겁지겁 먹는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 아이들의 목적지는 대개 학원이다. 내가 아는 아이들은 권쥐와 권쥐의 단짝 친구를 빼고 죄다 학원을 다닌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인데 대부분은 학원을 몇 군데씩 다니는 편이고, 권쥐의 단짝 친구는 가정형편이 좀 어렵다.

여하튼 아이들이 앳된 얼굴로 입에 욕을 달고 다니는 게 충분히 이해가 갈 지경이다. 주변 친구들이 모두 지옥에 사는데 권쥐도 별수 없었겠지. 물론 아이들이 과잉학습의 결과로 욕까지 배운 건 아니겠지만, 오늘날 아이들의 삶이 이런데 욕 말고 달리 할 말이 있긴 있나?

지난주에는 한 대학의 강연을 다녀왔다. 강연장에는 50명 남짓한 대학생들이 앉아 있었고, 하나같이 다들 진지한 눈빛이었다. 마침 내 강연 제목은 ‘못해도 괜찮아’였는데, 눈빛들이 사뭇 진지해서 아무래도 못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어떤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주변 친구와 끊임없이 비교되며 학원을 몇 군데씩 옮겨 다녔을 테고, 컵라면을 수도 없이 먹었을 테고, 학원 가는 길에 몇 번이나 주저앉았을 텐데, 그 친구들이 꼭 권쥐의 미래 같았다. 그런데 그게 과연 끝인가? 그 친구들은 조만간 얼마 남지 않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혹은 어렵게 차지한 그 일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또다시 경쟁해야만 한다. 나는 그 친구들에게 감히 못해도 괜찮다고 말하기가 대단히 송구했다. 에이, 시발.

축구 경기에서는 늘 이긴 쪽이 사람들의 주목을 독차지한다. 개중에서도 골을 넣은 선수는 그날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만약 관중석의 어떤 관중이 벌거벗은 채로 경기장에 난입을 한다면? 축구 경기의 주인공은 골을 넣은 선수겠지만, 그날 스포츠 뉴스의 헤드라인은 그 관중이 장식하지 않을까?

미친 짓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다수일 수밖에 없다. 주인공은커녕 대부분은 서로 고만고만한 실력을 겨루며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칠 뿐이다. 어디로 향해 가는지도 모르면서 앞사람의 뒤통수나 발뒤꿈치를 좇는다. 그러다 앞사람이 사라지면?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했지만 아무 보람이 없다면? 그제야 나는 누구였고, 또 무얼 원했는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너무 늦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이 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할 틈이 없도록 경쟁을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닐까? 인생이 축구 경기라면, 그 축구 경기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은 골을 넣는 것 말고도 분명 있는데 말이다.

만약 자기 아이가 정말 행복하길 바란다면, 궤도를 벗어날 수 있는 용기부터 길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 용기는 어쩌면 경쟁에 지칠 대로 지친 부모들에게 더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가장 처음 만나는 선생님은 대개 자신의 부모니까. 우리 적어도 아이들에게 욕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경쟁은 그만 물려주자. 이기지 않고도 행복해지는 방법 좀 가르쳐주자. 우리 실은 다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인생이 축구 경기라면, 적어도 나는 매번 이기지 못했다. 아주 이따금 이겼을 뿐이고, 질 때가 훨씬 더 많았다.

권용득 만화가·<하나같이 다들 제멋대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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