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라이프
카페로 변신하는 롤러스케이트장
20대엔 데이트 장소, 40대엔 체력단련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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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인천 숭의동 롤캣 롤러장에서 장재웅(왼쪽)·장아영(오른쪽) 커플이 손을 잡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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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를 그린 영화나 텔레비전 속에서 봤던 롤러장인데 실제로 타보니 신기하고 재밌어요.”
미세먼지가 가득했던 지난 8일 오후, 인천 숭의동에 위치한 ‘롤캣’ 롤러스케이트장(롤러장)에서 만난 대학생 커플 장재웅(25)·장아영(24)씨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롤러장을 둘러봤다. 이들은 이날 처음 롤러스케이트를 타봤다고 했다. 주로 영화관 등에서 데이트를 했던 이들은 롤러장 데이트는 처음이었다. 장재웅씨는 “초등학생 시절 롤러블레이드라 부르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본 경험은 있는데 롤러스케이트는 처음이다”라며 신기해했다. 장아영씨도 같은 경험이 있다.
한때 ‘청소년 탈선 조장’ 유흥장
‘복고 열풍’ 타고 날개 활짝
떡만둣국·파스타 매점메뉴 다채
롤러장 마니아들, 밴드 모임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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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호기심’, 40대 ‘추억’
“인라인스케이트와 롤러스케이트 가운데 어떤 게 더 어렵냐”고 물었다. 두발 자전거와 네발 자전거의 차이라서 당연히 롤러스케이트가 더 쉽다고 답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장아영씨는 “인라인스케이트가 더 쉬워요”라고 했다. 균형도 더 잘 잡히고, 멈출 때 더 안정감이 있단다.
세대차를 느꼈다. 40대인 기자는 롤러스케이트와 인라인스케이트 둘 다 경험했는데 당연히 롤러스케이트가 더 쉽다고 생각하는 세대다. 장씨 커플에게 롤러스케이트는 익숙하지 않은 ‘신기한 물건’이었다. 둘은 “재밌다. 앞으로 또 올 거 같다”며 손을 잡고 라인으로 나갔다. 중심을 잡느라 몸은 뒤뚱거렸지만,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그들를 뒤로하고 992㎡(300여평)의 롤러장을 천천히 둘러봤다. 기자가 경험했던 1980년대 롤러장과는 같은 듯 달랐다. 1980년대 유행했던 런던보이스, 유리스믹스 같은 유로댄스 음악이 귀청이 떨어지도록 나오고, 사람들이 라인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도는 것은 같았다. 초보자는 안쪽 라인에, 잘 타는 사람은 바깥 라인을 도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바깥 라인을 도는 사람들은 뒤로 가기, 옆으로 가기, 회전하기 등 묘기를 부리며 앞사람을 추월해 나갔다. 몸을 쓰는 장소에서는 각종 묘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잘 먹히는 자랑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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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장 이용요금은 롤러스케이트 대여료를 포함해 2시간 기준 성인 1만원, 미성년자 8000원이다.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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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점이 있는 것도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각종 과자, 음료수에 떡볶이, 떡만둣국까지 팔고 있었다. 매점을 구경하는데 “주문하신 떡볶이 나왔습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롤러장을 울렸다. 하지만 전반적인 인테리어는 과거보다 훨씬 세련됐다. 체육관에 조명만 달아 놓은 수준이 아니었다. 잘나가는 클럽이나 펍 같은 분위기였다. 마치 세련된 카페처럼 카르보나라를 매점에서 파는 것도 달라진 점이었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1980~90년대 롤러장은 주로 학생들이 찾았다. 사춘기가 빨리 온 ‘날라리’ 초등학생부터 ‘잘나가는’ 중고등학교 언니·오빠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2017년 롤러장 안은 학생 비율이 10%도 안 되는 듯했다. 대부분은 20~30대였고,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휴게 공간에서 땀을 닦고 있던 40대 남성 두 명을 만났다. 인천에 사는 안아무개(47)씨와 오아무개(49)씨였다. 직장에 다니는 이들은 거의 매일 저녁마다 롤러장을 찾는다고 했다. “직장 다니다보니 운동량이 부족한데, 롤러스케이트가 은근히 운동이 많이 된다”고 안씨는 말했다. 옆에서 듣던 오씨는 “다섯 바퀴만 돌면 전날 먹었던 알콜이 쏙 빠진다”며 맞장구를 쳤다.
안씨는 스마트폰을 들어 이 롤러장에 출입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모임(밴드)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언제 모이자” 등의 정보가 공유되는 곳이다. 이 롤러장에만 밴드가 3~4개 된다고 했다. “고등학생 때 롤러장 많이 다녔다. 당시 인천에만 롤러장이 열댓개 됐던 거 같다. 우리 나이대는 추억 때문에도 많이 찾는다”고 오씨는 말했다.
롤러장 대표인 권기범(40)씨는 “지난해 2월 문을 열었다. 처음엔 아이들과 부모님이 함께 노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많이 찾아 놀랬다”고 말했다. 시간대에 따라 오는 나이대도 다르다. 오전과 낮엔 아이들과 엄마, 저녁 시간엔 연인, 깊은 밤이 되면 40대 이상이 많이 찾는다. 롤러장이 특정 세대만 찾는 곳이 아닌 전 세대를 아우르는 공간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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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가’ ‘응답하라’…복고의 힘
권 대표가 처음 사업 구상을 말했을 때 주변에선 모두 “미쳤다”며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주말에는 수백명 이상이 찾아 롤러장이 꽉 찬다는 것이 권 대표의 설명이다. 대전에 2호점까지 냈으니, 사업적으로도 꽤 성공한 셈이다. 운동만이 목적이 아니라 데이트까지 하고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 접목된 ‘카페형 롤러장’은 이곳이 대표적으로 유명하다. 인천에 생기고 나서 일산에만 두 곳이 생겼고, 다른 지역에도 비슷한 콘셉트의 롤러장이 개장을 준비중이다. 권 대표는 “올해 안에 10곳이 넘게 생길 것 같다”고 했다.
이렇듯 사라졌던 롤러장이 부활하고 있는 모양새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를 보면 2009년 전국의 롤러스케이트장은 107개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매년 늘더니, 2015년 말 기준 147개로 37.3%가 늘었다. 지난해 8월 서울시는 시청사 지하 시민청에 롤러장을 한시적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롤러장은 한때 한국 놀이문화의 중심이었다. 1972년 대구에서 한국 최초로 롤러스케이트장이 생긴 뒤 전국에 우후죽순 퍼져나갔다. 한때 서울에만 100여곳, 전국적으로 1000여곳의 롤러장이 성업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롤러장을 체육시설이 아닌 청소년 탈선을 조장하는 유흥장소로 분류했다. 담배를 물고 사는 학생들이 몰려가기도 했던 오락실과 같은 업종으로 본 것이다. 학생들의 탈선 장소로 낙인찍힌 롤러장은 규제 대상이었다. 서울시는 1977년부터 도심이었던 강북지역의 롤러장 신규 허가를 내지 않았다. 1980년 11월 규제를 풀었는데, 이를 언론에서 비중 있는 ‘뉴스’로 다룰 정도였다.
성업하던 롤러장은 1990년대 들어 쇠퇴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여가 생활의 발달, 치솟는 부동산 임대료 등 여러 상황이 겹쳤다. 1990년대 말 인라인스케이트가 유행하면서 비슷한 형태였던 롤러장은 잠시 붐을 일으키는 듯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사라졌던 롤러장의 재등장은 사회의 전반적인 ‘복고 열풍’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무한도전>의 ‘토토가’ 특집이나,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의 큰 인기도 한몫을 했다. 권기범 대표도 “<응답하라> 시리즈 열풍이 롤러장 사업을 시작하게 된 큰 동기였다”고 말했다.
트렌드 분석 업체인 ‘트렌드랩506’ 이정민 대표는 “현재 한국의 주요 소비층인 4050세대는 자신들이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고 예전에 즐겼던 문화를 다시 향유하고 싶어한다. 이들이 복고 열풍의 주역이다. 롤러장이 다시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천/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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