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03 14:41
수정 : 2017.08.0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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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 촬영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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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에 빠진 영화기자 이성욱
일본 에이브이(AV) 취재 경험도
“인간의 욕망 투명하게 받아들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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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 촬영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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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씨네21>의 ‘내 인생의 영화'라는 칼럼 꼭지에 ‘나의 청춘을 지배한 너, <타부>’라는 글을 썼다. 10대 초반에 처음 만난 포르노에 대한 이야기였다. 2002년 <한겨레21>에 국내 에로영화 촬영 동행기 ‘전라의 남녀가 욕을 보더라’를 썼다. 2004년 <씨네21>에 ‘일본AV, 음란영화의 모든 것-그 현장을 가다’를 커버스토리로 썼다.
음란물 전담 기자였냐고 누군가 물어봐도 이상하지 않을 흔적들이다. 내가 유난히 별났던 것일까? ‘내 인생의 영화’ 칼럼 마지막 문단이 이랬다.
“서른이 넘어서야 나를 마구 휘둘러대던 성욕과 친구처럼 지내게 됐다. 삐딱한 성교육 선생이 되어준 포르노에서도 비로소 풀려났다. 그러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거리감을 둘 수 있는 나이가 됐고, 음란물의 한복판에 파고들 여지가 생긴 일을 하게 되자 정면승부를 해보자는 욕심이었던 것 같다. 욕망의 대리충족이라는 각도에서 보더라도 이게 남자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얼마 전에 읽은 <나는 과학이 말하는 성차별이 불편합니다>(마리 루티 지음)의 한 구절이다.
“이성애자 남성들이 벌거벗은 여성의 사진에 흥분하고, 동성애자 남성들이 벌거벗은 남성의 사진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다면, 이성애자 여성들은 누구든, 어떤 종류든 관계없이 성 활동 중인 모든 생물의 사진에 흥분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다수가 자신들이 흥분한 사실을 보고하지 않는다. 연구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연구에 사용된 물리적 측정 도구가 높은 수준의 흥분을 분명하게 나타내는데도, 많은 여성이 그들 앞에 제시된 이미지에 흥분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부인했다.”
이 글을 청탁받던 시점에 하필 일본 도쿄에 있었다. 그날 저녁, 긴자 부근 술집 골목길에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채소와 고기, 해산물을 고루 구워 먹다가 술집 위층이 모두 렌털 호텔이라는 걸 알게 됐다. ‘45분 기준 1600엔(약 1만6200원)’이라는 안내문 입구가 코앞이라 수시로 드나드는 다채로운 남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리따운 여성 몇 명이 반복적으로 드나드는 게 특이했다. 이 광경에 취해 일행 중 한명이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젊은 시절, 하루 동안 연속 7번의 잠자리를 한 뒤 다음날 거기에 허물이 생겨 벗겨냈다는…. 그는 왜 아무도 우리에게 섹스의 모든 것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고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치게 하느냐고, 비로소 알 것 같을 즈음에는 인생이 저물고 있더라는 것에 굉장한 울분과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지금 이대로라면 미래의 10대, 20대라고 우리 세대와 다를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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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영화 촬영장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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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시절의 나는 음란물의 생산과 소비의 정점에 있는 일본이 몹시 의아스럽고 궁금했다. 대부분의 조직에서 격식과 예의를 엄격히 따르고, 보수정치의 상징인 자민당이 수십년 동안 집권하고 있는 나라. 그 이면에 서구 포르노보다 더 노골적이며 음습한 ‘에이브이’(AV·성인물)가 해마다 수천편씩 제작되고 유통 가능한 모든 채널로 쏟아지는 현실. 한국에선 상상 불가의 현상이 버젓이 벌어지는 이웃 선진국의 비밀이 궁금했다. 그래서 도쿄의 한 촬영장 섭외에 성공했고, 여러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왔지만 돌이켜보면 여러모로 실패였다. 통역을 맡아준 이가 미모의 여자 유학생이었는데, 나에게 이런 취재를 왜 하는 거냐고 거듭 갸우뚱거렸다. 그가 촬영장에서 내 시야를 뒤통수로 절반 이상 가려버려 생생한 현장 목격에 실패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에이브이가 일본 사회에서 갖는 위치나 역사 등의 궁금증을 풀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그 허기 땜에 몇 년 뒤 ‘씨네21북스’ 편집장이 됐을 때, 관련 일본 서적을 뒤져 <15조원의 육체산업>을 번역, 출간했지만 마찬가지로 실패의 연장이었다.
한국과 아주 큰 차이점 하나는 분명하다. 반투명막의 모자이크가 열쇠다. 반투명 너머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이든 간에 그 모자이크를 지렛대 삼아 합법의 지위를 얻는 것이다. 미국에서 영화 <래리 플린트>가 잘 보여준 바, 래리 플린트는 <허슬러>라는 도색잡지가 수백만부가 팔리며 성업하자 음란물 간행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고,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를 끌어들여 ‘역경'을 이겨냈다. 일본에서는 모자이크의 투명도를 놓고 공권력과 줄다리기가 벌어지곤 할 뿐이다.
포르노는 매춘보다 간접적인 하수구 문화라는 오명을 벗어낼 도리가 없다. 섹스와 도박은 식욕보다 앞서는 본능일지 모른다. 불법 도박사이트 등 도박 시장의 규모가 연 84조원에 이르러 외식 시장을 넘어선다고 한다. 거대 시장의 기저에 도도하게 흐르는 욕망을 못 본 체하는 우리의 끝은 어디에 가닿을지 불안하다.
욕망의 경제학은 정치와 이어진다.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가 자본주의를 유지, 강화하는 데 어떻게 기여해왔는지에 대해 전통 좌파 이론과 페미니즘은 공통의 견해를 갖는다. 술자리에서 내가 나라를 만든다면 이렇게 할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지곤 한다. “결혼은 5년 단임제로 할 거야. 결혼을 연장하고 싶으면 엄격한 심사를 통해 1회 허용하고….”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심각한 출산율 저하의 이면에는 경제적 어려움, 육아 및 교육의 어려움 등만 있는 건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의 욕망 그 자체를 투명하게 보고, 받아들이며 그 위에 어떤 삶을 설계할 것인가를 다루는 욕망의 정치가 부재한 탓도 있어 보인다. 미래는 인간을 심심하게 만들 시간적 여가가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라 예고하는 ‘4차 산업혁명'이 유행어처럼 떠돈다. 이 와중에 과연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있을까?
이성욱 스토리컴퍼니 대표, 전 <한겨레> <씨네21> 기자
에로 영화(Ero movie)
성적 욕망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의 영화. 성애 장면을 주로 다루지만 직접 성행위를 하지는 않음. 실제 성행위를 집중 묘사하는 포르노 영화와는 구별됨. ‘에로’는 에로틱을 줄인 일본어식 표현. 정확한 표현은 ‘에로틱 무비’(Erotic movie), ‘에로틱 필름’(Erotic film)이나 한국에선 ‘에로 영화’(Ero movie)로 통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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