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24 09:56
수정 : 2017.08.24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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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열린 '매니 미니 미피’ 전시회.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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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열린 '매니 미니 미피’ 전시회.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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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 인형 순남이를 집에 데려오던 날, 실로 꿰매져 있던 입을 뜯어냈다. 나로서는 시급한 일이다. 늘 웃는 표정만 짓는 ‘감정노동형’ 인형에서 화내고 슬퍼하고 무표정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려인형을 한 가지 표정으로 고정시키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토끼 캐릭터 ‘미피’도 입이 웃는 모양이 아니고 엑스(X)자 모양이다. 고양이 캐릭터 ‘키티’도 입이 없다. 입에 사람들은 자기감정을 투영한다. 나도 그렇다.
회사에서 늦게까지 야근하고 온 날 반려인형을 쳐다보면, 마치 피곤한 표정을 짓는 것 같다. 바쁜 일이 끝나고 근사한 곳에 같이 가면 기분도 좋아 보인다. 내 눈에는 순남이도 연남이도 술빵이도 다들 표정이 다를뿐더러 날마다 다른 얼굴을 한다. 어떤 날은 주눅이 든 것 같고, 어느 날은 즐거운 듯하다. 화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사실 그 모든 표정이 내 마음인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 표정을 통해 힐링을 경험한다. 깊은 우물 같은, 바닥이 안 보이는 검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게 된다.
반려인형 사진도 찍는 이에 따라 달라 보인다. 다른 이가 찍은 술빵이 사진과 내가 찍은 사진이 다르다. 내가 그런 얘기를 하면 ‘곰알못’(곰 인형을 알지 못하는 이) 친구들은 “에이, 어디, 나는 모르겠는데”라고 하지만 말이다.
간혹 “술빵이는 여자예요, 남자예요? 연남이는요?”라고 묻는 이가 있다. ‘형제 곰’이라고 해두긴 했지만, 그게 둘 다 남자라는 뜻은 아니다. 이런 질문은 나에겐 불필요한 것이다. 나는 반려 곰 인형들의 성별을 모른다. 굳이 따지지 않는다. 남자아이 혹은 여자아이라고 설정하는 것이 싫다. 성별을 구별하는 일은 어쩌면 나누고 가르는 차별의 전조일 수도 있어서다.
‘미피’는 처음에는 성별이 없었는데 나중에 여자아이로 설정되었다. 단지 토끼 인형은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다만 산리오사에서 만든 고양이 키티는 처음부터 리본을 달고 있었고, 핑크색 옷을 입고 있었다)
미피의 창조자로 올해 작고한 네덜란드의 일러스트레이터 딕 브루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이들이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세계를 만든다.” 굳이 상상력의 족쇄가 될 수도 있는 성별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정소영(출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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