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26 11:21
수정 : 2017.10.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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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익씨가 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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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류 블로그 ‘아이러브펜슬’ 운영자 ‘세릭’ 만나보니
다채롭고 소박한 ‘필기구 덕후’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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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익씨가 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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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구류 전문 블로그 ‘아이러브펜슬’의 운영자 ‘세릭’(본명 조세익·37)은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컬렉터용 한정판 문구, 고가의 문구류를 ‘배격한다’.” 실컷 좋다고 리뷰를 써놨는데, 너무 비싸거나 국내에서 안 팔아서 구할 수 없으면 독자들 입장에선 “소위 빈정이 상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 전 읽은 <궁극의 문구>의 저자 다카바타케 마사유키를 떠올렸는데, 그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수입 만년필은 훌륭하다. 문호의 서재나 대기업 임원이 쓰는 책상에는 그런 문구가 어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고급 차) 페라리보다 소형 트럭이 편리할 때가 있다.” 그는 도구에는 목적에 맞는 선택기준이 있고 고급 사양 물건이라도 쓰임에 맞지 않는 경우엔 소용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며, “평범한 문구의 팬으로서 책상에서 매일 맹활약 중인 늠름한 문구들에 경의를” 표했다.
조세익씨의 문구 철학은 다카바타케와 비슷해 보였다. 그의 블로그는 여타 ‘펜 컬렉터’의 사이트와 달리 국내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필기구에 대한 진지한 리뷰로 가득하다. 세심하게 촬영된 해당 펜의 사진과 함께, 펜의 기술적 스펙보다는 펜을 실제로 써본 느낌 중심의 사용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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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익씨가 수집한 펜들.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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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경기도 성남 판교 테크노밸리에서 조세익씨를 만났다. 판교의 한 회사에서 모바일 앱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그는 1천여 자루의 펜을 소장하고 있는 ‘필덕’(필기구 마니아)이다. 2006년부터 10여년째 필기구 전문 블로그를 운영 중이다. 지난해 말 100개의 필기구 컬렉션을 소개한 책 <더 펜>(the PEN)을 출간하기도 했다.
‘필덕’으로서 활동의 첫 시작은 국내 필기구 커뮤니티 중 규모가 큰 세 곳 중 하나인 네이버 카페 ‘샤프 연구소’였다. 어릴 적부터 필기구를 좋아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걸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카페에 리뷰를 올렸다. 그러다 자신의 블로그를 열었고, 글을 쓰면서 더 좋은 펜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다. 펜들을 본격적으로 구입하기 시작했다. 펜의 구입은 교보문고 핫트랙스, ‘필덕의 성지’로 정평 난 서울 종로5가의 승진문구(문구랜드), 아마존재팬에서 직구(직접 구매) 등을 주로 이용했다. 일본에 갈 때마다 대형 잡화점 도큐핸즈나 로프트에 들렀다. 그렇게 하나하나 구입해 사용해보고 리뷰를 쓰다 보니 어느새 1천여 자루의 펜 소장자가 됐다.
다양한 필기구 중에서도 그가 좋아하는 것은 학생들이 가장 많이 쓰는 필기구인 샤프펜슬이다. 블로그의 글 중에서도 샤프펜슬 관련 리뷰가 월등히 많다. 그는 “샤프펜슬은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그 안에 공학적 메커니즘이 집약돼 있다”며 “어떤 샤프심을 쓰느냐에 따라 ‘필기감’도 달라져 조합해 쓰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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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익씨가 수집한 펜.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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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익씨가 수집한 펜.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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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갖고 나온 다섯 개의 필통 중 하나를 열어 자신이 아끼는 샤프펜슬들을 소개했다. 완충 스프링이 내장돼 있어 샤프심이 잘 부러지지 않는 ‘제브라 델가드 엘엑스(LX)’, 쓸 때마다 샤프심이 자동으로 미세하게 돌아가 한쪽만 닳는 것을 방지하는 ‘유니(UNI) 쿠루토가’, 샤프심이 자동으로 나오는 ‘파이롯트 오토맥’ 등.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펜텔 P207’ 모델이었다. 몇만원대인 다른 샤프들과 달리 5000원대의 이 샤프는 ‘필알못’인 내 눈에도 익숙한 모델이었다.
그는 “펜텔 P207은 제도용 샤프펜슬로 비교적 저렴하고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어 사람들이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신뢰도가 높다”며 “샤프심이 잘 부러지지 않고 오래 써도 막히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실용성을 중시한다는 그다운 평가다. 그의 블로그에는 이처럼 하나의 펜을 오랜 기간 사용해 본 뒤, 사용기를 덧붙여놓은 글도 여럿이다. “1년 이상 지나면 잉크가 굳어서 나오지 않거나, 잉크가 종이 다음 장에 배어 쓸 수 없게 되는 펜도 있다. 오랫동안 썼을 때 좋은 펜들은 그런 경우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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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익씨가 수집한 펜.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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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익씨가 수집한 펜.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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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최근에 구입한 펜을 물었더니, 의외로 몽블랑의 클래식한 모델 ‘마이스터슈튀크 149’ 만년필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1924년 처음 출시돼 오랫동안 많은 작가와 명사들에게 사랑받아온 이 만년필은 100만원대의 고가다. 그는 “하도 좋다고 해서 사 봤는데, 고가라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알았다”고 했다.
그는 파이롯트, 세일러, 플래티나(플래티넘) 등 일본 브랜드의 만년필이 한글을 쓰기에 적합한 면이 있다고 했다. 획이 많고 방향 변화가 잦은 일본의 문자와 한글이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다. 일본 만년필은 10만원대의 합리적 가격에도 좋은 모델을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반면 유럽의 만년필들은 부드럽고 좋긴 하지만 알파벳에 최적화돼 있어 직선으로 뚝뚝 끊어지고 방향 전환이 급한 한글을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필덕’인 그는 종이에 손글씨 쓰기를 고집하는 메모광일까? 그렇지 않다. 그는 아이티(IT)업계 종사자답게 메모할 때 주로 스마트폰의 ‘에버노트’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스마트폰으로 메모할 때와 종이에 필기구로 글을 쓸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기존에 종이와 볼펜이 하던 일들을 디지털 기기가 대체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구는 편리성을 위해서가 아닌 ‘취미활동으로서’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Pen
종이 따위에 글씨를 쓰는 필기구. 깃털이라는 뜻의 라틴어 ‘펜나’(penna)가 어원이다. 스마트 시대, 펜은 ‘기록’의 역할을 디지털 기기에 넘겨줬다. 어느새 펜은 취미, 놀이, 장식, 감상의 대상이 되었다.
이로사 객원기자 leerosa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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