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22 20:22
수정 : 2017.11.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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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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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신해철보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그에게 의지할 때가 있어
당시 느꼈던 고마움은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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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세대에게 신해철은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다. 민주화라는 거대 담론이 대학 캠퍼스를 거쳐간 뒤 신해철이 주목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나’를 포기하고 국가와 민주주의에 헌신하던 전 세대와는 분명히 달랐다. 나의 생각, 나의 태도, 나의 앞날에 대해 고민할 것을 외친 신해철의 노래를 들은 청년들은 지금 건국 이래 가장 젊은 40대라는 소리를 듣는 ‘영 포티’가 됐다. 신해철의 노래와 함께 대학 시절을 보낸 건축가 오영욱(오기사)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신해철과 나’라는 주제로 글을 보내왔다. 굵은 글씨체는 신해철의 가사를 인용한 부분이다. 편집자 주
1997년 봄, 나는 스물두살이었다. 강릉 주문진 바닷가엔 아직 개발의 열풍이 미치지 않았다. 미세먼지가 없었던 맑은 하늘은 다소 차가웠다. 인적 없는 평일의 바닷가는 절망의 끝 같았다.
그곳에서 이어폰을 낀 채 걷고 있었다. 녀석은 한 여자로부터 실연을 당했고 또 다른 여자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며 지난밤 철없이 떠들었던 술자리의 숙취가 남아 머리가 지끈거렸다.
원래는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 당시는 ‘노력’이란 이름의 긴장감이 청년들에게 강요되지 않는 시대였다. 많이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것이 대학생의 미덕이기도 했다. 지하철 2호선 환승역이던 을지로3가에서 반대 방향의 열차에 올랐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대신 동서울종합터미널의 고속버스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바다에 도착했다.
휴대용 시디(CD) 플레이어였는지, 워크맨이라고 불리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반복해서 음악을 들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면 시디 플레이어였나 보다. 한 곡 반복재생 모드로 들었던 노래 중 하나는 신해철이 리더였던 록 밴드 ‘넥스트’ 2집 수록곡인 ‘디 오션’(The ocean)이었다. 한 번 플레이 될 때마다 마음의 0.1퍼센트 정도가 위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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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신해철.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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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담배를 입에 대기 전이었던 나는 온전히 장소와 음악으로 추위와 외로움을 소비했다.
슬픔도 기쁨도 좌절도 거친 욕망들도 저 바다가 마르기 전에 사라져갈 거라고 신해철이 읊조렸다. 수업 시간에 노래와 어울리는 바닷가에 있다는 사실이 제법 근사하게 여겨졌다. 실체가 없었던 고통이 현실의 고독감 앞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다시 그녀들이 떠올랐다. 어설프고 지질한 남자의 사연이 파도에 밀려왔다. 심장을 붙잡고 삐삐 음성메시지를 보냈던 순간과 화사한 봄날에 삐삐의 수신음을 기다렸던 애절했던 기억들이 다시 나를 짓눌렀다.
어쩌면 고통이 필요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호프’를 듣기 위해서 나는 더 아파야 했다. 바닷가 어딘가에 걸터앉았다. 노래가 시작되며 치유의 의식이 거행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들 속에서 이렇게 힘든 때가 없었다고 말해도(나쁜 여자…)
하지만 이른 게 아닐까 그렇게 잘라 말하기엔(맞아요…)
곁에 있던 사람들은 언제나 힘들 때면 어디론가 사라지고 혼자란 걸 느끼지(죽도록 외롭긴 하네요…)
하지만 그게 세상이야 누구도 원망하지 마(원망하진 않아요, 그저 미울 뿐…)
그래 그렇게 절망의 끝까지 아프도록 떨어져(지금 떨어져 있어요…)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큰 소리로 외치면(제가 외칠 성격은 아니에요, 그저 삭이는 스타일…)
흐릿하게 눈물 너머 이제서야 잡힐 듯 다가오는 희망을 느끼지(지금 이 느낌이 희망일까요?)
그 언젠가 먼 훗날엔 반드시 넌 웃으며 말할 거야 지나간 일이라고(또 결국 그렇게 되겠죠?)
서울에 돌아왔을 땐 밤이었다. 집으로 가는 대신 온갖 개똥철학이 난무할 학교 앞 술자리를 찾아갔다. 자정이면 모든 술집이 문을 닫아야 하는 시대였다. 단속의 위험에서 자유로운 으슥한 곳에 위치해 있던 포장마차로 술자리가 이어졌다. 저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아픔들을 안고 있는 20대 초반 남자들이 모여 자신들의 ‘쌍X’에 대해 토로했다. 불과 몇주 후면 이미 만취한 삼수생 형과 과 커플이 될 동기 여자아이는 나름 진지하게 그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다.
치유의 유효기간은 길지 않았다. 절망이 지배하는 술자리에서 나는 언제 바다에 다녀왔냐는 듯 불과 몇시간 만에 다시 실체 없는 고통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다 지나간 일이기에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오리라는 신해철의 목소리는 나를 허무주의자나 냉소주의자로 이끄는 것도 같았다.
그 시절 만난 몇몇 여자아이의 이름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자기보호 본능으로 자신의 추했던 기억을 가장 먼저 지워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년이 지난 지금 과거를 돌이키면 가장 선명한 흔적은 끝까지 내 편으로 남아 있었던 치유의 음악들뿐이다. 그 중심에 신해철이 있다.
지금 나는 ‘호프’를 작곡했던 시절의 신해철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여전히 그에게 의지할 때가 있다. 어린 시절 구구절절 다가왔던 가사의 의미도 의미거니와 당시에 느꼈던 고마움이 여전히 기억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죽음 소식 이후 나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고마운 그의 음악들로 뮤지컬 시나리오를 써보기 시작했다. 실제 영화로 만들거나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가상의 이야기 속에 나의 사연과 신해철의 음악을 섞어 보며 그 과정 자체를 즐기고 한편으로 추모했다.
가끔씩 시간이 날 때마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지질한 한 남학생의 이야기를 2년 만에 완성했다. 총 열다섯곡을 가져다 썼는데 오프닝 곡은 ‘여름 이야기’고, 클라이맥스 곡은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나 ‘일상으로의 초대’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곡이다. 당연히 ‘그대에게’도 나온다. 자막이 올라갈 땐 ‘먼 훗날 언젠가’가 흐르는 것을 상상했다. 시나리오 순서대로 노래들을 저장해놓고 지금도 종종 차례대로 들으며 혼자만의 감상에 빠지곤 한다.
그런데 이 시나리오에는 ‘디 오션’과 ‘호프’가 없다. 그 시절 내게 그렇게 중요한 노래였음에도 내용상 들어갈 만한 상황이 없었다. 나는 이제 이 음악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치유되었거나, 혹은
나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과 그에 수반되는
기나긴 고독이 희미해져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오기사(오영욱)/건축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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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윤동길(스튜디오 어댑터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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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철의 촌철살인 어록
신해철이 평소에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뜯어야 맛이다’라는 속담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 등에서 전문가 패널 못지않은 언변을 구사하는 그를 볼 때, 최소한 ‘달변가’ 수준이었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의 촌철살인 어록을 모아봤다.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많은 분노를 느꼈다. 국가의 틀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2003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
“댄스 위주의 음악가와 라이브 음악가는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 퍼포먼스 가수의 립싱크는 있는 그대로 즐기고, 라이브가 듣고 싶으면 콘서트장으로 가라.” (2006년 ‘고스트 스테이션’)
“불법으로 다운받는 사람들은 다운받고 욕이나 안 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뭐 좋으네 나쁘네 하지 말고 그냥 닥치라는 거죠.” (2007년 ‘무릎팍 도사’)
“동방신기와 비의 노래를 유해 매체로 지정할 게 아니라, 국회 자체를 유해 장소로 지정하고 뉴스를 차단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국회 역시 19금이다.” (2008년 ‘100분 토론’)
“이 나라는 술에 잠겨 가라앉고 있는 나라다. 우리나라는 술 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다. 사람이 술을 지배해야지 술이 사람을 지배하면 쪽팔린 것이다.” (2009년 고려대학교 특별 강연)?
“물에 빠진 사람을 우리가 구하지 않았다는 죄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의 죽음은 민주주의를 되돌리는 전기를 마련해줄 수 있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사람이 죽었다.” (2009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공연)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냐. 닥치고 힘내라.” (2013년 자신의 트위터)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에 대해 신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2014년 ‘비정상회담’)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Shin hae chul(신해철)
1968년 서울 출생. 뮤지션, 음악 프로듀서, 라디오 디제이, 방송인 그리고 독설가. 별명은 ‘마왕’.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 리더로 대상을 받으며 데뷔. 솔로, 밴드(넥스트 등), 영화음악 등 총 35장의 앨범 발표. 대표곡으로는 ‘그대에게’,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민물장어의 꿈’ 등이 있음. 2014년 불의의 의료사고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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