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1.23 09:59
수정 : 2017.11.2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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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통의동 진화랑 ‘생각생각-신해철의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전시’에 전시중인 서원미 작가의 ‘Shinhaechul(魔王)’. 신해철의 카리스마와 강렬함을 표현했다. 사진 진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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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주기…추모 열풍 식을 줄 몰라
사상에 집중하는 미술 전시회도 열려
“자유 외치는 개인주의자들이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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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통의동 진화랑 ‘생각생각-신해철의 생각에 생각을 더하는 전시’에 전시중인 서원미 작가의 ‘Shinhaechul(魔王)’. 신해철의 카리스마와 강렬함을 표현했다. 사진 진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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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인 2014년 10월27일, 신해철은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여전히 대중은 그를 놓아주지 못하고 있다. 추모의 열기가 식을 만하지만, 식기는커녕 질적 변화의 움직임마저 보인다. 추모 공연을 넘어 그를 소재로 한 미술 전시회까지 열리고 있다. 전시회가 집중한 것은 신해철의 음악이 아니라 그의 ‘사상’이다. 신해철이란 인물이 단순한 음악인이 아니라 그 이상의 영향을 사회에 끼쳤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신해철’은 어떤 의미일까, 왜 대중들은 그를 계속해서 소환하는 것일까.
1988년 12월24일, 12회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은 처음 대중 앞에 섰다. 그는 대학생 밴드 무한궤도의 리더였다. 신시사이저 사운드를 전면에 배치한 ‘그대에게’는 신해철이란 인물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대중은 ‘똘똘해 보이는’ 이 스무살 청년에게 열광했다.
이듬해 무한궤도의 공식 데뷔 앨범이 나오고, 대마초로 인한 구속, 그리고 솔로 앨범이 발매되는 1990년 초반까지 신해철은 대중문화의 뜨거운 아이콘이었다. 하이틴 스타의 대표 인물이기도 했다. 당시 그가 출연한 운동화 광고의 “슬퍼하지 마, 타이거가 있잖아”라는 광고문구가 아직도 회자될 정도다.
1992년 밴드 ‘넥스트’ 결성 뒤로는 진중한 뮤지션의 행보를 이어나갔다. 1997년 해체 전까진 언더그라운신을 제외하고 신해철이 이룬 음악적 성취는 서태지와 함께 독보적이었다. 한국에선 성공하기 어려운 프로그레시브록을 전면에 내세운 그의 음악에 대중과 평단은 동시에 환호했다.
이랬던 그가 2002년 ‘효순이·미선이 사건’ 추모 무대에 오르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연설을 하면서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뒤 각종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얘기하는 등 후반기 신해철의 모습은 사회를 향한 독설로 무장한 ‘마왕’으로 기억된다.
2001년부터 2012년까지 방송된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 스테이션’도 마왕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 20~30대 팬은 이 방송을 들으며 대입을 준비하던 고등학생들이거나 아직 갈팡질팡하던 대학생들이었다. 이 방송에서 신해철은 디제이가 아니라 마왕으로 불렸다. 뮤지션과 마왕, 이 두가지 이미지는 신해철의 팬층을 넓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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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생 ‘신해철과 나’. 진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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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이 열광했고, 아직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신해철이 세상 속에서 소외돼가고 있던 ‘나’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신해철은 1968년생이면서 87학번, 즉 현재 한국 사회의 중심인 이른바 ‘386세대’다. 하지만 기존의 386과는 달랐다. 그와 친분이 있던 <문화방송> 조승원 기자는 그를 “화염병과 노래방이 공존하던 시기에 나온 희한한 투사”라고 평가한다.
91학번인 조 기자는 “신해철은 세상을 바꾸자는 386선배들과 달리 ‘나’를 바꾸자고 주장했다. 나를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고 본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신해철의 생각은 2집 <마이셀프>의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50년 후의 내 모습’ 등의 노래에서 잘 표현돼 있다.
많은 이들이 국가와 사회, 통일, 민주주의 같은 커다란 것을 고민해야 했던 시기에 신해철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세월에 떠다니고 있을까”(‘50년 후의 내모습’ 가사 가운데)라며 나의 미래를 고민했다. 또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라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그의 노래를 듣고 ‘나’를 고민했던 90년대 학번은 지금 역사상 가장 젊은 40대라는 ‘영포티’ 소리를 듣는다. 영포티 세대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나를 위해 산다’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 속에서 신해철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신해철과 동갑인 경희대 이택광 교수(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는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공화주의 세력과 개인을 중시하는 개인주의 세력이 섞여 갈등하는 상황에서 나온 현상”이라며 좀 더 의미를 부여했다. 신해철로 상징되는 개인주의가 현재 한국 사회의 주요 흐름인 공화주의 물결에 맞서는 양상이라는 얘기다.
풀어 얘기하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겪은 대중들이 망가져버린 공공의 선과 이익을 되살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절감했고, 이것은 문재인 정부 출범의 원동력이 됐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공공의 선을 위해 다소 불합리하지만 개인이 참아야 하는 세상이 된 측면도 생겨났다.
지난해 촛불집회 때 디제이디오시의 여성 혐오 가사나, 집회 현장에서 일어났던 성추행 사건에 대해 ‘정권 교체라는 대의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는 여론이 나왔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각종 문제가 있는 청와대 안팎의 인사들에 대해 사퇴를 거론하는 것이 ‘적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 교수는 “개인이 아닌 시민의 책임감을 강화하는 공화주의 쏠림 현상이 심해지자 자유주의로 무장한 개인들이 개인주의의 화신인 신해철을 재점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해철이 살아 있었다면 이 현상에 대해 뭐라고 답했을까. 아마도 심드렁하게 코를 파며 “그런데 말이야,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건 뭔데?”라고 묻진 않았을까.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Shin hae chul(신해철)
1968년 서울 출생. 뮤지션, 음악 프로듀서, 라디오 디제이, 방송인 그리고 독설가. 별명은 ‘마왕’. 1988년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 리더로 대상을 받으며 데뷔. 솔로, 밴드(넥스트 등), 영화음악 등 총 35장의 앨범 발표. 대표곡으로는 ‘그대에게’,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민물장어의 꿈’ 등이 있음. 2014년 불의의 의료사고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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