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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07 10:00 수정 : 2017.12.07 10:00

제주 알뜨르 비행장의 벙커. 송호균 제공

제주 알뜨르 비행장의 벙커. 송호균 제공
제주에도 벙커가 있다. 일제가 조성한 알뜨르 비행장이 그 현장 중 하나다. 주차장의 안내센터에서 위치 설명을 듣고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잠시 달리니 야트막한 동산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누가 벙커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저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언덕에는 샛노란 들국화 향기가 가득했다.

어른이 몸을 웅크리고 지나야 할 정도로 좁은 입구로 들어서자 그야말로 암흑이다. 내부에 작은 전등을 켜놓았지만 그 주변만을 수줍게 비추고 있을 뿐 칠흑 같은 어둠을 걷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휴대폰으로 조명을 켜고 벙커 내부로 들어갔다. 20여 미터에 이르는 굴을 이중으로 파내고 촘촘하게 벽돌을 쌓은 뒤 벙커 내부를 시멘트로 마감했다.

일제는 1920년대 중반부터 인근의 모슬포 일대 주민들을 동원해 지하 격납고와 벙커를 포함한 알뜨르 비행장을 지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끌려가 땅을 파고 돌짐을 져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알뜨르 비행장은 중국을 타격하기 위한 일제의 전초기지가 됐다. 일본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알뜨르 비행장에서 다시 주유를 하면 중국 본토의 베이징, 난징까지 닿을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과의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뒤에는 비행장 규모는 더욱 확장됐고, 일본의 ‘가미카제 특공대’도 이곳 알뜨르 비행장에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여전히 19곳의 지하 격납고가 남아 있고, 이곳 벙커는 유사시에 물자와 인력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한다. 역사의 아픔은 계속됐다. 알뜨르 비행장 인근의 섯알오름에서는 제주 4·3 사건 당시 수백명의 양민이 학살당한 현장도 있다.

벙커의 반대쪽 출구로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목가적인 풍광이 다시 펼쳐진다. 주민들은 알뜨르 비행장 주변에서 그대로 농사를 짓고 있다. 가을무가 풍성하게 익어갔고, 억새가 바람에 휘날렸다. 안덕과 대정의 경계선에 위치한 단산과 모슬봉이 눈에 들어온다.

알뜨르 비행장의 아픈 역사를 체험하는 ‘다크투어리즘’의 끝에서 다시 웃고 즐기는 여행자 모드로 전환할 때가 왔다. 사람과 자본이 몰리면서 몸살을 앓고 있는 제주의 다른 관광지와 달리, 알뜨르 비행장 인근은 제주의 원초적인 정취를 아직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송악산에서 사계항에 이르는 해안도로에서는 유려한 해안의 절경과 함께 산방산, 한라산, 박수기정의 기암절벽이 한눈에 펼쳐진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저 멀리 서귀포시의 범섬, 문섬, 섶섬까지 볼 수 있다. 인근의 모슬포에서는 그 유명한 제주 방어가 제철을 맞았다.

Underground

땅속, 지하를 통칭. ‘지상’이 복잡해지면서 ‘지하’를 활용한 대중교통, 복합상가 및 근린시설 등이 급속히 확대되는 추세다. 영국에서는 지하철을 의미하기도 하며, 반체제 활동 조직이라는 뜻도 있다. 방송에 나와 대중성 짙은 음악을 하는 사람(오버그라운드)과 달리 클럽 등 소규모 공연을 선호하며 소수의 마니아층에게 알려진 뮤지션을 ‘언더그라운드’라고 칭하기도 한다.

송호균(제주도민이 된 육아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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