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20 21:01
수정 : 2017.12.2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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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미생’.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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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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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미생’.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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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은 거장이라 말씀하시는 훌륭한 분의 악보라고 생각을 해요. 이 드라마는 그 악보를 피아노로 친 연주라고 생각해서, 음계만으로 상상을 했다면 저희가 그 소리를 들려드리는 작업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티브이엔(tvN)의 <미생> 제작발표회 때 배우 임시완은 원작과 드라마의 관계를 악보와 연주에 빗댔다. 윤태호 작가의 원작을 존중하되, 그것을 해석하고 표현하는 배우 임시완의 포부는 자기 몸보다 품이 큰 정장을 입고 나타난 것에서 알 수 있었다. 첫 출근할 때 아버지의 구식 양복을 빌려 입었던 드라마 속 장그래의 모습으로 나서고 싶었다는 뜻이다.
원작의 첫 출근 날에는 양복과 관련한 내용이 없지만, 드라마는 몸에 맞지 않는 어색한 옷을 입은 장그래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 아직 확신하지 못하는 자신의 쓸모를 낯선 조직에서 증명해내야 하는 사회초년생의 불안을 담아낸다. 원작 웹툰이 장기간 연재되며 직장인 독자와 두터운 공감대를 형성했듯이, 취업전선에서 분투하는 젊은이들과 공명하며 새로운 시청자로 끌어들이려는 드라마의 전략인 셈.
바둑을 그만두고도 바둑을 통해 사고하는 원작의 장그래는 비범한 개인에 가까웠고, 그 면모를 아는 후원자가 회사에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 별 무리 없이 넘어간다. 하지만 인턴으로 회사에 발을 들일 기회조차 적은 젊은 시청자를 대상으로 삼을 때, 장그래의 ‘낙하산’은 큰 저항 요소다. 낙하산이란 사실이 드러난 채 경쟁하고, 동료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극 초반은 이를 보정하기 위한 장치이다. 드라마가 다소 감정적이고 신파가 섞여든 에피소드를 통해 장그래의 수난을 부각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물론 <미생>은 장그래 1인을 위해 나머지 인물들을 들러리로 세우지 않았다. 직장인들이 진지하게 생각하는 조직의 체계와 업무의 규칙을 구체적으로 다뤘고, 그 때문에 고졸에 낙하산이라는 이례적인 입지의 장그래가 비정규직 시스템 안의 젊은이들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이름이 될 수 있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넘치는 즈음, <미생>을 돌아보는 것은 가장 성공한 사례로 꼽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드라마의 평가기준은 아직까지도 시청률에 좌우되는 경향이 있다. 웹툰 원작 드라마도 마찬가지. 시청률이 높았던 드라마에서 성공의 이유로 꼽히던 요소가 시청률이 낮은 드라마에선 실패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때, 앞서 임시완이 말했던 악보와 연주자의 비유를 <미생>의 바깥으로 확장을 해도 유용하다. 원작 웹툰과 드라마를 나란히 놓고 어떤 부분이 소실되고 덧붙여졌는지, 무엇 때문인지 살피다 보면 드라마 제작진이 보인다. 드라마가 웹툰 원작을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지, 원작의 어떤 대목을 연주하기 어려워서 어물쩍 넘어갔는지, 혹은 원작보다 더 파고드는지. 누구를 대상으로 연주하는지와 그 대상의 수준을 높게 보는지 낮게 보는지 여러 각도로 살필 수 있다. 원작과 드라마는 별개라는 입장을 지지할 때도, 그런 의견이 제작진의 책임회피용인지 아니면 드라마의 매체 특성을 잘 이해하고 맥락을 탄탄히 한 진짜 별개의 작품으로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인기가 높은 웹툰일수록 ‘원작 파괴’라는 비난을 들을 공산이 크다. 장기간 원작 웹툰과 유대를 쌓은 독자층은 이미 판단과 이해를 마친 캐릭터가 맥락을 벗어나는 변화를 겪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이들은 드라마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저 완고한 소비자일까? 원작에서 장사가 될 법한 설정이나 소재만 취하거나, 표절 논란을 피하기 위한 방어적인 판권 구매에 그치던 드라마 제작 관행이 다소나마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직장생활의 현재를 재조명하게 했고, 대형마트에서 노조 만드는 이야기(<송곳>)가 드라마의 주요 갈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를 다루고 동시대 사람들이 즐기는 웹툰에 기대어서 비로소 가능했다.
유선주(드라마 칼럼니스트)
WEBTOON
웹툰. 디지털로 보는 만화.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스마트기기가 대중화되면서 문화산업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야기와 캐릭터, 과감한 상상력을 갖추고 있어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 게임 등으로 각색된다. 스마트기기만 있으면 어디서든 간편하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증강현실’ 기술을 이용해 독자와 캐릭터를 직접 교류시키는 ‘인터랙티브툰’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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