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3 19:44
수정 : 2018.01.03 20:05
[ESC] 커버스토리
|
대학생 이서연씨의 유튜브 채널. 유튜브 갈무리.
|
“이 도널드 덕 인형은 아프면 잡으라고 있는 건가요?”
“네. 하하. 모질 굵기에 따라 다른데 처음 하시는 거면 아플 수도 있어요.”
직원은 의사가 수술을 준비하듯 빠른 속도로 장갑을 끼며 사무적으로 말했다. 며칠 전 성기와 항문 주변 털을 제거하는 ‘브라질리언 왁싱’을 했다. 왁싱 테이프를 총 24번 뜯어내는 동안 나를 위로해준 건 바로 그 도널드 덕 인형이었다.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왜 그 아픈 걸 했냐고 묻는다면 ‘하고 싶어서’라고 말하겠다.
왁싱을 했다고 친구에게 말하자 친구는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들려줬다. 얼마 전 에스비에스(SBS) 예능프로그램 <미운 우리 새끼>에서 개그맨 박수홍이 브라질리언 왁싱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친구 어머니는 한국에선 성기 주변을 왁싱한 여성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다며 친구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
나도 알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하지 않은 이유는 아플까 무서워서도 있지만 한국 문화에서 브라질리언 왁싱을 한 여성은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편견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월경마다 털 때문에 관리가 아무리 힘들어도, 수영복 입을 때 바지까지 입는 불편을 무릅쓰고도 왁싱은 하지 않았다.
외모, 학벌, 직장, 사는 동네 등 모든 것이 남에게 평가받는 한국 사회에 길들여진 나는 남들과 다르게 보이는 걸 자연스럽게 꺼리게 됐다. 그런 내게 브라질리언 왁싱은 타인의 시선에 대한 작은 반항이다. 타인의 평가에 굴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었다.
지난해 20대를 관통한 트렌드는 ‘욜로’(YOLO), ‘나홀로족’, ‘나로서기’ 등이다. 욜로는 ‘유 온리 리브 원스’(you only live once)의 약자로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는 뜻이다. ‘나홀로족’은 혼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여행 가는 등 함께하는 사람이 없이도 여가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을 말한다. ‘나로서기’는 ‘나로서’와 ‘홀로서기’를 합쳐, 외부에 기대지 않고 자신한테서 자존감을 찾는다는 뜻이다. 청년들이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왁싱을 한 나도 이들 중 한 명이다.
대학생 이서연(24)씨는 지난해 1월부터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영상 주제는 ‘휴학생의 일상’,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방법’ 등 소소하다. 구독자 수는 125명으로 많지는 않지만 연연하지 않는다. 꾸준히 영상을 올리고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때문이다. 이씨는 “외모에 대한 자신도 없고, 만든다고 누가 볼까 싶어 미뤄왔지만 휴학하면 하고 싶은 걸 많이 해보고 싶었다”며 “막상 해보니 왜 이제야 시작했나 싶었다. 모르는 사람이 팔로 하고 댓글도 다는 모습을 보고 신기하면서도 뿌듯했다”고 말했다.
취업준비생 최호진(24)씨는 얼마 전 뮤지컬 공연 무대에 섰다.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뮤지컬로 자기계발을 하는 아마추어 뮤지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넉달 동안 일주일에 3시간씩 춤과 노래를 연습했다. 최씨는 “항상 남의 시선을 신경 쓰고, 실패를 두려워했던 나로서는 큰 도전이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몰랐던 새로운 내 모습도 발견하고 부족한 나를 자책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15~29살 청년실업률은 9.2%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결혼, 인간관계, 연애, 꿈마저 포기한다는 ‘엔(N)포 세대’라는데 무엇이 놀라울까? 청년들은 이제 ‘언제 취업하니?’, ‘결혼은 언제 하니?’ 등의 질문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있다. 입사지원서에 ‘자소설’(소설 같은 자기소개서)을 쓰다가도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과 영화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그때만큼은 누군가의 자식도 아니고, 취업준비생도 아니고, 미래의 가장도 아니고, 엔포 세대도 아니다. 그저 ‘나’일 뿐이다. 그런다고 사회가 말하는 돈 많고 명예로운 ‘훌륭한’(?) 사람이 되진 않겠지만 소소한 행복까지 포기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나도 다음엔 이 몸으로 당당하게 목욕탕을 가고 싶다.
임세연(대학생)
Youthful life
사회적 나이보다 젊게 사는 삶의 방식. 젊은 세대와 소통하려고 애쓰며, 다양한 취미생활로 자신의 인생을 즐긴다. 피티(PT) 같은 근육 운동을 비롯한 건강관리는 필수다. 요즘은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나이를 ‘0.7 곱하기 계산법’으로 산출하기도 한다. 현재 나이에 0.7을 곱하면 현대사회에 어울리는 나이가 된다.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의욕적으로 활동하는 ‘액티브 시니어’도 등장했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