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11 09:13
수정 : 2018.01.11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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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지안재의 구불구불한 모양새가 우여곡절로 가득한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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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
신석기시대 빗살무늬 지그재그 패턴
인류와 함께한 디자인
우리 삶도 그와 비슷해
갈지(之)자 삶이야말로 진정한 지혜 녹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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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지안재의 구불구불한 모양새가 우여곡절로 가득한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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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000년께, 한강 유역에 살던 한 ‘신석기 인간’은 고민에 빠졌다. 그 앞에 놓인 것은 끝이 뾰족한 타원형 토기. 그는 한 손에 무늬 새기개(시문구·施文具)를 쥐고 있었다. 잠시 뒤 그는 토기 위에 무언가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쓱싹, 쓱싹, 쓱싹.’ 그리기를 마친 뒤 입으로 후후 불어 남아 있던 흙을 털어내자, 어떤 모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
신석기 인간이 선택한 것은 질서 있게 나열된 기하학적 문양이었다. 어떤 의미였을까. 아무도 모른다. 다만 생선뼈의 모양과 닮아 있어, 현대의 역사가들은 ‘어골무늬’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러한 어골무늬로 장식돼 있는 토기를 우리는 ‘빗살무늬토기’라 부른다. 빗살무늬는 요즘 시각에서 보면 지그재그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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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암사동 일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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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지그재그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온 가장 친근한 디자인이다. 서양에서 지그재그라는 단어가 나온 것은 17세기 말 독일로 추정된다. 의성어인 ‘치크차크’(Zickzack)가 모태다. 이빨이나 톱니라는 뜻의 차케(Zacke)가 어원이라고 한다. 치크차크는 톱니 모양의 무언가가 무엇을 자를 때 나는 소리를 표현한 단어다. 톱이 나무를 자를 때 나는 소리가 독일인에겐 ‘치크차크’처럼 들린 것이다.
의성어지만, 단어의 생김새 때문에 현대인들은 지그재그를 의태어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마치 알파벳 제트(Z)나 한자 갈지(之)자처럼 걷거나 배가 가는 모양새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지그재그의 유행은 항상 현재 진행형이다. 신석기 시대 ‘잇템’(it+item) 빗살무늬토기부터 최근 패션계에서 유행하는 지그재그 패턴까지 그 생명력이 유지되고 있다. 자연 친화적이어서 인간이 친근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 옛날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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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지안재의 구불구불한 모양새가 우여곡절로 가득한 우리의 삶과 닮아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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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디자인에서 지그재그 패턴이 본격적으로 활용된 것은 두차례의 세계대전 뒤다. 악몽과 같은 현실을 목격한 인류는 신줏단지처럼 모시던 ‘인간 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고, 이성으로 쌓아올린 반듯한 세상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그재그로 대변되는 비정형적 디자인의 탄생이다. 인간 이성에 대한 반작용이 불러온 것이 지그재그라는 것은 지그재그가 이성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가깝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휘돌아 나가는 강이나 긴 세월 쌓인 퇴적층 등 자연은 지그재그와 가깝기 때문이다.
디자인적 형태미를 제외하더라도 우리의 삶 자체는 지그재그와 닮아 있다. 한 방향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뻗어 나가는 인생을, 우리는 꿈꾼다. 우여곡절이 없는 삶 말이다. 하지만 실제의 삶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 이런저런 시련을 겪는다. 굴곡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빨리 목표를 달성하고 싶다고? 하지만 탄탄대로의 삶이야말로 실재하지 않는다는 걸 우린 이미 안다. 오히려 지그재그 갈지자로 산 인생의 한 순간에서 지혜를 얻기도 한다.
인생을 보통 산과 비교한다. 삶을 이어간다는 건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것과 진배없다.
이쯤 등산로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를 살펴보자. 2009년 미국 워싱턴대학교와 영국 사우샘프턴대학교는 가파른 지형을 올라갈 때 지그재그로 가는 것이 더 빠르고 효율적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을 오를 때 처음엔 평지처럼 직선으로 오르려 하지만, 이내 체력의 한계를 느끼고 경사가 완만한 곳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지그재그 길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구불구불한 이유는 그것이 효율적이고 더 빠르기 때문이다. 거리가 짧다고 무작정 직선 코스를 택하다간 올라가지도 못하고 힘이 빠져 포기하게 되는 이치다.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삶도 얼마 가지 않아 지치기 마련이다. 갈팡질팡, 시행착오, 부침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 나, 당신, 그리고 우리의 삶이다. ‘새옹지마’, ‘고진감래’, ‘전화위복’, ‘우후지실’ 등 한자성어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과학의 눈으로 봐도, 우리의 세상을 이루는 것 가운데 직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빛은 직선이 아니냐고? 빛을 아주 가까이서 보면 지그재그 방식으로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일종의 파동이다. 직진성이 가장 강력한 빛도 결국 지그재그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의 이치다.
다음은 김훈의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가운데 한 구절이다. 박물관에서 돌칼을 보던 딸이 묻고 주인공 장철민이 답한다.
“손이 할 일이 뭐야?”
“마음이 할 일을 대신 하는 거다. 너무 무언가를 깎거나 자르거나 다듬고 싶을 때가 있지? 그게 사는 거란다. 그러니까 돌칼은 뾰족하고 날카로워지는 거지.”
우리 인생의 길이 지그재그로 깎여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의 심장이 단단해진다는 의미일지 모른다.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도움말 안창모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참고자료 <이대학보사>(2011년 5월9일치 칼럼 ‘지그재그(zigzag): 톱으로 자르는 소리’), <빛의 물리학>
Zigzag
지그재그. 알파벳 제트(Z) 또는 한자 갈지(之)자 형태나 그러한 모습으로 나아가는 것을 뜻함. 프랑스어로는 ‘우여곡절’이란 뜻도 있음. 건축, 패션, 게임 등 일상생활에서 두루 쓰이고 있으며, 갈팡질팡하는 인간의 행동이나 인생을 상징하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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