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08 10:08
수정 : 2018.02.08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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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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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
소설 속 가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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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 <한겨레>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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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만 해놓고 나면 이미 겨울이다. 나는 성급하게도 새해의 설계를 할지도 모른다. 새해의 가계부를 위해 여성지의 신년호를 사는 진부한 방법으로나마.”
박완서 산문집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 중 ‘은행나무와 대머리’를 읽다 멈칫했다. 신년호? 여성지의 가계부는 늘 12월호에 나왔다고 알고 있었으나 1982년 전까지는 1월호 부록으로 나갔다. 옛날 가계부 표지에 어째서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십장생이 단골로 출현하나 궁금했는데 신년호 부록이었으니 학이 날아다니는 근하신년 카드와 같은 의미일 수도 있겠다.
일상생활을 집요하고 날카롭게 그려내던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는 가계부가 꽤 여러 번 등장한다. 산문집 <쑥스러운 고백>에 실린 ‘어리석음의 미학’에서 작가는 수입의 40%를 적금으로 떼놓고 살림을 해서 표창까지 받은 이의 가계부를 언급한다. “3남매나 되는 어린 자녀와 노인까지 계셨는데 1개월의 간식비가 500원 미만이었고, 부식은 내역도 비참하리만큼 초라했습니다. 그러고도 수입의 반 가까이를 저금한 것입니다. 나는 그 살림꾼 주부에게 형언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꼈습니다. 저축장려회 같은 데서 들으면 큰일 날 소리지만 말입니다.” 미래 설계를 한다고 오늘의 행복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을 우려하는 뜻이다.
목덜미가 선득한 단편소설도 있다.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매일 시위하듯 밥 대신 ‘아이스케키’를 사 먹는 아이와 신경전을 벌인다. 사위가 새로 장가를 든 뒤에도 끊임없이 김치를 해다 나르는 아이의 외할머니도 아무 때고 들이닥쳐 딸과 사위가 ‘참말로 원앙 같은 금슬’이었다며 여자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남자는 병을 앓다가 죽은 전처의 흔적을 모두 치운 줄 알고 있지만, 여자는 전처가 남편을 증오하는 내용을 가계부에 일기처럼 써놓았던 것을 알고 있다. “이대로는 못 죽어 엄마에게 다 고해바치고 죽어야지. 악마, 위선자, 이중인격자.” 아이의 외할머니를 당장 내쫓고 싶은 여자는 노인에게 무서운 고통을 주기로 마음먹는다. 죽은 딸의 남편과 결혼한 여자를 뜻하는 제목이 반전을 품고 있는 ‘움딸’은 소설집 <저녁의 해후>에 실려 있다.
유선주 객원기자 oozwish@gmail.com
가계부: 가정의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장부. 제3자의 시각에서 가족 혹은 개인의 소비습관을 파악할 수 있어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기에 유용하다. 수입과 지출을 적은 뒤에는 분석과 반성, 변화가 필요하다. 요즘에는 종이가계부뿐 아니라 스마트기기용 가계부 앱도 많다. 한국 가계부의 시초는 어사 박문수(1691~1756) 집안에서 쓴 <양입제출>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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