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2.28 19:44
수정 : 2018.02.28 19:50
[ESC] 김태권의 고기고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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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김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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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제주 한복판 ‘바삭’이라는 돈가스 전문점에서 ‘인생 돈가스’를 만났습니다. 도톰하게 썬 흑돼지에 직접 만든 큼직큼직한 빵가루를 입혀, 겉은 바삭하게 속은 보드랍게 튀겼지요. 다른 종류의 음식 같았어요. 분식집이나 학생식당에서 먹던 돈가스, 고기도 얇고 튀김옷도 거친 옛날 돈가스와는 말이죠.
육식의 본고장 유럽에 갔을 때 ‘돈가스의 원조’라고 이야기되는 슈니첼을 먹어봤습니다. 보통 송아지고기로 만들지만 닭고기로 만든 ‘헨헨슈니첼’도 유명하죠.(발음이 어려워 주문할 때 고생입니다. “아인말 헨헨슈니첼, 비테!”) 그런데 웬걸, 고기는 좋은 고기인데 맛은 외려 한국의 분식집 돈가스와 비슷했어요. 어찌 된 영문일까요?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오카다 데쓰의 책 <돈가스의 탄생>을 읽고서죠.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 지도자들의 고민거리는, 근대화의 격심한 차이도 차이지만, 위로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에 이르는 서구인과의 체형의 차이”였대요. 그래서 정부와 지식인이 앞장서 육식 캠페인을 벌였습니다. 1872년에는 메이지 임금이 직접 고기를 먹는 행사를 열었고요.
육식에 반대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흰 천을 몸에 감은 자객들이 “이방인 추방”과 “육식 반대”를 위해 궁전을 습격했다가 사살되기도 했어요. 그러나 쇠고기를 스키야키로 먹으며 일본 사람들은 육식에 눈을 뜹니다. 1929년, 돈가스의 탄생이 ‘입맛 근대화’의 정점이었다고 이 책은 주장하네요.
일본요리 돈가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포크커틀릿이나 슈니첼은 얇은 고기를 얕은 팬에 지지듯 튀깁니다. 반면 일본식 돈가스는 도톰한 돼지고기를 깊은 튀김그릇에 풍덩 담가 덴푸라처럼 튀겨내고요. 그런데 돈가스가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다시 변화가 일어났어요. 분식집 돈가스는 재료를 아끼기 위해 프라이팬에 얇은 고기를 자작자작 튀겨내지요. 유럽의 슈니첼 맛이 나는 것은 이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육식으로 체격을 키우고 사회를 근대화해야 서양을 이긴다”는 일본의 논리가 눈에 띕니다. 이 주장은 동시대 인도에서도 먹혔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전통신앙에 따라 고기를 먹지 않았어요. 그런데 몸이 건장한 간디의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래요. “우리는 고기를 먹지 않아서 약한 민족이 됐다. 영국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고기를 먹기 때문이다.” 친구는 간디에게도 염소 고기를 먹으라며 권했습니다. ‘인도의 근대화를 위해서’라는 명분이었죠.(이후 간디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지난번 글에서 살펴보았고요.)
고기는 맛있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을 때 우리의 마음은 불편합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겠다는 쪽도 먹지 말자는 쪽도 이런저런 이유를 댑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조국 근대화를 위한 육식’ 논란을 살펴봤어요.(19세기와 20세기에 아시아에서 유행했던 이론이지요.)
그때 사람들은 진지했을지 몰라도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아무 말 대잔치’ 같습니다. 지금껏 육식에 찬성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상대를 설득할 만한 논리는 대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육식을 하느냐 마느냐의 결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인의 윤리적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남의 살을 먹을 때면 생각이 많아지네요.
김태권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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