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3.01 09:59
수정 : 2018.03.01 16:51
[ESC] 곽정은의 단호한 러브 클리닉
Q 저는 30대 중반의 워킹맘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결혼 전에는 자존감이 너무 낮고 항상 제 자신을 비하하며 살았습니다. 난 너무 예쁘지 않아서 연애는 꿈도 못 꿀 거라고 생각하던 때 적극적으로 저를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남자와 첫 연애를 했습니다.
사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 남자가 좋다는 것을요. 그 외에는 관심사와 성격 등 통하는 것이 없었죠. 그래도 첫 연애의 달콤함이 제 이성을 마비시킨 것인지 깊은 고민 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혼 연차가 쌓일수록 많이 힘들었습니다. 남편의 다혈질적인 성격과 이성을 잃을 때 보이는 폭력성, 저에 대한 집착, 모든 것을 일일이 다 챙겨줘야 하는 일상생활 능력 부족, 융통성 없고 표현 센스가 너무 없어서 저를 여러 번 서운하게 하는 일, 상식을 벗어난 행동 등.
제일 슬픈 것은 이 사람과 나는 섹스는 할지언정 소통은 부재하다는 점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둘이 접점이 없다 보니 대화는 전무하며 기껏해야 아이들 교육 문제라든지 부모로서의 대화 정도입니다.
결혼을 해도 너무 외로운 느낌과 독박육아에 대한 힘듦, 남편에 대한 원망까지 더해져 우울증이 올 지경입니다. 그런데 제가 연기를 잘하는 것일까요? 남편은 저 없으면 못 산다며 저에 대한 애정을 줄곧 피력합니다. 하지만 저에겐 그 못 산다는 의미가 제 존재가 아닌 저와의 섹스에 국한된 것처럼 느껴지기에 전혀 달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다른 남자가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같은 일터의 상사분인데 이분과 대화하면 너무 잘 통하고 즐거워서 같이 있는 게 즐겁습니다. 내가 이런 남자와 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했나, 바보같이 첫 연애로 결혼을 했을까 후회까지 되는군요.
상사분과 사적으로 전혀 만나지 않지만 주5일 회사에서 만나는 게 너무 좋고 즐겁습니다. 10년 넘게 잠들고 있던 제 연애세포가 새록새록 깨어나는 것 같아 설레기도 합니다. 저의 착각일 수도 있으나 그분도 저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이 있으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부질없는 일이고 그래 봤자 전 부도덕하고 불륜 직전의 여자일 뿐이겠지요? 남편과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죄책감과 미안함에 마음을 다잡아야지 하지만 너무 힘듭니다. 이곳을 그만둬야 하나 생각도 했지만 사실 상상조차 하기 싫습니다.
주변 다른 유부녀들은 남편하고 잘 통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그냥 사는 거라고 하는데 왜 나는 그게 안 되는지 제 자신이 밉습니다. 오히려 잘 통하는 사람과의 즐거움을 맛본 뒤라 괴리감만 커지고 있습니다. 신랑과 있을 때의 저는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터놓고 말할 수도 없는 문제이기에 이렇게나마 고민을 올립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고 욕하셔도 좋으니 제 고민에 대한 상담 부탁드립니다.
밤샘 고민녀
A 첫 줄에, 이 슬픈 사연의 시작과 끝이 있네요. 자존감이 너무 낮고 항상 스스로를 비하하며 살아왔다는 말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와 맺는 관계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로 당신의 많은 시간이 흘러왔네요. 내가 나의 가장 좋은 친구가 돼주어야 하는데, 당신의 삶은 때때로 얼마나 고단하고 외로웠을까요.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그런 나의 모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노력하겠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마음, 그러나 이 모습 그대로도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바로 자존감입니다.
스스로 비하하고, ‘난 사랑받지 못하겠구나’라는 것에 생각이 멈춰버리면 더 이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고 노력하지 않게 되죠. 다만 어떻게든 나를 선택해줄 사람에게 구원받고 싶은 욕망만이 남습니다. 자기 차의 운전석에서 내려, 가장 먼저 나를 선택해줄 사람에게 운전대를 넘기게 되는 거죠. 위험천만한 인생의 히치하이킹을 하는 겁니다. 운이 좋았다면 좋은 사람을 만났겠지만, 당신은 자존감도 없었고 하필이면 운도 없었네요. 폭력적인데다 집착이 심하고 소통도 힘든 사람이 당신이 놓은 운전대를 잡아버렸으니까요. 자존감이 있다고 해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자존감이 바닥인 채로는 인생의 거의 모든 상황이 위기 상황으로 변해갑니다.
결혼 전엔 달콤하게 굴던 남자가 결혼 뒤에 폭력적으로 변했을 때, 당신은 그저 무기력하게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을 거예요. 스스로를 존중해본 적이 없는데 타인이 당신을 존중하지 않을 때 어떻게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어요? 문제를 제기했다가 버림받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고 이미 겁이 나 있을 텐데요. ‘당신 없으면 못 살아’라는 말을 일말의 ‘애정’이라고 생각할 만큼 당신은 여전히 당신을 돌보지 않고 있는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삶이 비극적으로 흘러가는 건,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이라서가 아닙니다. 다만 잘못된 선택을 하고, 그것을 되돌리지 않는 선택을 했을 뿐이죠. 하지만 답은 생각보다 쉬울 수 있어요.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내가 오류가 있던 인간이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을 헤쳐나올 힘도 생기는 법이니까요.
저 역시 낮은 자존감으로 허우적대던 20대 후반에 당신처럼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다 아주 후회스러운 선택을 했던 적이 있어요. 30대에 결혼을 하지 않은 채로 지내면 초라할 거라고 생각할 만큼 저는 저라는 사람에 대해 자신이 없었어요. 하지만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순간, 영혼의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죠. 정말로 내 인생을 구원하는 건 남자가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선택을 하겠다는 나의 깨달음과 다짐이라는 것을요.
지금은, 인생의 위기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눈을 번쩍 뜰 기회이기도 합니다. 당신의 진짜 문제는 남편과의 불화가 아니에요. 그런 남편을 선택하고도 그냥 삶이 흘러가는 대로 ‘다 그렇게 사는 거’라는 말처럼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죠. 설혹 남편 몰래 불륜을 감행하게 된다고 해도, 상사와의 관계가 당신의 삶을 훨씬 더 괴롭고 복잡하게 만들 거예요. 어쩌면 당신은 그저 위험천만한 히치하이킹을 또 한번 감행하고 싶어 하는 것일지 모르겠네요.
방법은 여러가지일 수 있어요. 그동안 방치했던 자기 존중감을 찾는 방법 말이죠. 믿고 존경할 만한 사람과의 주기적인 대화도 좋고, 심리치료 클리닉을 가는 것도 좋을 거예요. 저는 혼자 떠나는 여행, 주기적인 운동과 명상을 통해 저를 돌보고 있어요. 몸을 돌봐야 몸이 건강해지듯, 마음도 계속 돌보지 않으면 나약하고 부정적인 생각들로 휩싸이기 쉬우니까요. 여전히 제 안의 일부는, 사랑을 통해 구원받고 싶어 하니까요.
그러니 당신도 부디, 오랫동안 방치하고 무시했던 자신을 돌볼 시간을 만드세요. 자신을 측은히 여기고 스스로에 대한 자비심을 가져보세요. 당신 스스로를 위해 뭐든 하려고 애쓰다 보면, 자존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겠죠. 그리고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게 될 겁니다. 이 편지를 제게 보낸 당신의 그 답답한 마음이, 스스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당신에게 작은 희망이 될까요?
곽정은 작가
※ 사랑, 섹스, 연애 등 상담이 필요한 분은 사연을 보내주세요. 곽 작가가 직접 상담해 드립니다. 보낼 곳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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