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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01 10:05 수정 : 2018.03.01 10:08

그림 김보통

[ESC] 보통의 디저트

그림 김보통
일곱 살인가 됐을 어느 날, 몸살로 앓아누운 어머니가 약국에 쌍화탕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는 재래시장 뒤편 골목에 살고 있었고, 약국은 시장을 가로질러 가야 했다. 꼬맹이 걸음으로 걸어도 5분이 채 안 되는 거리로 종종 심부름을 가곤 했던 곳이다.

천원을 손에 쥐고 시장을 지나친다. 고소한 냄새가 나는 참기름 짜는 가게를 지나면 순댓국밥이나 껍데기볶음 같은 것을 파는 노점들이 보인다. 옷가지들을 파는 상점과 신발가게를 지나간다. 연이어 장판 가게와 이불 가게를 지나쳐, 수입용품점 앞에서 잠시 멈춘다.

그곳엔 신기한 라이터가 있었다. 금발 미녀의 사진이 인쇄된 그 라이터는, 보는 각도를 살짝 달리하면 미녀가 입고 있던 옷이 스르르 벗겨졌다. 주인 아주머니가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으면 몇 번이고 각도를 달리하며 그 짓을 반복했다. 비밀스럽고 부끄러운 과거다.

약국에 도착해 쌍화탕을 하나 산다. 뜨끈한 쌍화탕을 봉지에 담아준 약사가 남은 돈을 거슬러 준다. 잔돈 중에 십원짜리가 몇 개 있다. 그중 20원으로 풍선껌을 사먹어도 아마 어머니는 눈치채지 못할 것이란 판단이 선다. 바로 옆 구멍가게에서 20원을 주고 풍선껌을 하나 산다.

입 한가득 풍선껌을 우물거리며 온 길을 되돌아간다. 손에는 쌍화탕이 담긴 봉지를 든 채다. 문득 봉지를 풍차처럼 돌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관성의 법칙을 스스로 깨친 것이었을까. 빙빙 돌려도 봉지 속 쌍화탕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확신이 들면, 시험해보고 싶어진다. 나는 탐구심이 뛰어난 아이였다. 애석하게도 실행력마저 뛰어났다. 다음 순간 망설이지 않고 봉지를 힘차게 돌렸고….

쨍그랑~.

동시에 봉지를 빠져나온 쌍화탕이 땅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한 바퀴도 채 돌리지 못했다. 마침 아까 수입용품점 앞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빈 봉지를 든 채 껌을 씹으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오가며 만날 라이터 훔쳐보던 ‘싹수가 노란 그 녀석이구나’ 하는 눈빛이었다. 혼내지는 않았다. 대신 “아가, 왜 갑자기 그랬어?” 하고는 깨진 유리병 조각을 치우고 대걸레로 바닥을 훔쳤다. 나는 우물쭈물하다 자리를 벗어나 집으로 향했다. 여전히 질겅질겅 껌을 씹고 있었다. 아직 단물이 빠지지 않은 때였다.

“아니 왜 봉지를 돌려?”

자리에 누워 끙끙 앓던 어머니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관성의 법칙을 깨달아서’라고 말하지 못했다. 관성이라는 말 자체를 몰랐지만, 떨어지는 쌍화탕을 보며 만유인력을 깨달았다고 해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란 걸 직감했다. 나는 그저 풍선껌을 혀 뒤로 숨긴 채 가만히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풍선껌에 대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결국 다시 심부름을 가야 했다. 어머니는 “절대로 돌리지 말고 얌전히 와”라고 신신당부했다. 나는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을 가로질러 약국으로 향하면서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 어리석은 짓은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그 증거로 이번엔 비밀스러운 라이터가 있는 수입용품점 앞도 무심하게 지나쳤다. 연달아 쌍화탕을 사러 온 내게 약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까같이 쌍화탕이 담긴 봉지와 잔돈을 돌려주었을 뿐이다. 단호히 잔돈을 주머니에 넣고 봉지를 든 나는 신중한 걸음으로 약국을 나서 집으로 향했고, 다시 수입용품점 앞을 지나치는데 문득, ‘아까는 관성이 작용하기 위한 충분한 속도를 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뿔싸. 가속도의 개념까지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깨달은 이상 실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결국 나는 다시 봉지를 돌리는 시도를 거듭했고, 보란 듯이 쌍화탕을 한 병 또 깨버렸다. 수입용품점 아주머니는 “너 자꾸 왜 그러니?” 하고 물었으며,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직접 약국을 가야만 했다. 껌의 단물은 이미 다 빠진 상태였지만 내내 뱉지는 않았다. 이유는 단물이 빠져 딱딱해진 상태가 풍선이 더 잘 불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그게 무슨 법칙인지는 여태 깨닫지 못했다.

김보통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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