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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06 15:20 수정 : 2018.03.06 16:24

김영진의 개인전 <타입(TYPE)>. 이우성 제공

김영진의 개인전 <타입(TYPE)>. 이우성 제공
김영진의 두 번째 개인전 <타입(TYPE)>를 보고 왔다. 김영진의 첫 개인전에 갔을 때 ‘장 미셸 바스키아’ 같다고 생각했다. 독특하고 낯설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작품은 흔하다. 세계에 ‘바스키아’ 같은 미술가들이 수백 수천 명은 될 거다. 그런데 ‘바스키아’ 같다는 말은 복합적이다. 왜냐하면 여전히 바스키아 식의 그림들은 세련돼 보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지만, 굉장히, 요즘 젊은 한국 시인들의 시 같다. 부연은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내가 김영진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낙서’ 때문이다. 그림 위에 적힌 낙서들. 물론 그것은 그림의 일부다. 그림 속의 주된 대상과 연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낙서다. ‘낙서’ 역시 바스키아가 즐겨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김영진이 ‘낙서’를 다루는 방식과 바스키아가 ‘낙서’를 다루는 방식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고, 나는 다만 그것이 얼마나 유효하고 적절한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첫 번째 개인전에 등장했던 작품들보다 두 번째 개인전에 전시된 작품들은 ‘낙서’를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번엔 낙서의 이면이 구체화되었다. 낙서는 다른 주요한 개념과 어떻게 연결될까, 라고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달까.

김영진의 개인전 <타입(TYPE)>. 이우성 제공

서구 미술의 형태, 동양 미술의 정서, 조형과 색에 대한 관심이 그의 작품을 이루는 개념들이다. 이 커다란 개념이 서로 막 섞인다.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은 쉽다. 충돌과 확장, 그 결과 만들어지는 낯선 맥락을 추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과 개념을 충돌시킨다는 것이 때로는 불친절하고(예술은 원래 불친절하지만) 무책임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낙서’가 그 모호한 충돌 사이의 간극을 어찌 됐건 메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누군가는 ‘위트’라고 부를 텐데, 나는 ‘의도한 혹은 의도된 소소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소소함’이 소소함을 넘어설 때 그것의 존재 가치는 분명해진다. 뜬금없이 ‘젊은 한국 시인들의 시’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면, 단어와 단어가 충동하고, 이미지와 이미지가 마구 부딪치고, 그 잦은 순간들 속에서 어떤 증후가 감지된다. 누군가는 그걸 그냥 두고, 누군가는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이끌고 간다. 김영진이 시인이었다면 후자였을 것이다. 지금 시를 읽는다는 건, 그림을 본다는 건, 그 충돌의 지점을 더듬는 일이다. 마치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빛을 만지는 것과 같다. 그 빛은 시와 시 사이, 그림과 그림 사이, 촌스럽게 적자면 액자와 액자 사이에 있다. 어쩌면 그 빛은 바스키아와 한국의 젊은 미술가를 잇는다. 그럼으로 한 편의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시간 위에 놓인 여러 겹의 그림을 보는 것이다, 읽어내는 것이다. 그림도 시도, 낙서 아니면 무엇인가! 앞으로 이런 낙서들을 연재할 예정이다.

※ 김영진의 두 번째 개인전 <타입(TYPE)>는 3월4일까지, 사간동 ’에이치오에이아르디’(HOARD) 갤러리에서 열렸다. 전시는 끝났지만 김영진의 웹사이트(kimyoungjin.co.kr)에서 언제나 그림을 볼 수 있다.

이우성(시인 겸 미남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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