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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3.14 20:41 수정 : 2018.03.14 21:09

[ESC] 보통의 디저트

그림 김보통
수능이 끝난 뒤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해봤다.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실내 낚시터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돌리는 것이었다. 굉장히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었으나, ‘돈을 번다는 것은 원래가 이런 것’이겠거니 하며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러 드디어 첫 월급을 받았다. 그 돈으로 평소 갖고 싶던 중고 비디오카메라와 외할머니에게 드릴 내복, 그리고 ‘베지밀’ 한 박스를 샀다.

외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특별히 애틋했던 것은 아니다. 보통 처음으로 돈을 벌면 집안 어른께 그런 선물을 하더라는 것을 보고 들어 흉내를 냈을 뿐. 비싼 내복을 사지도 않았다. 비디오카메라를 사고 남는 돈으로 내복과 베지밀을 샀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베지밀을 산 이유는 외갓집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사 가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외할머니가 베지밀을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워낙 어릴 적부터 그 모습을 봐온 터라 으레 외할머니는 베지밀만 드시는 줄 알았다.

외갓집에 도착해 대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없는 듯했다. 미리 연락을 하지 않았으니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찾아뵙기 며칠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다 쓰러지며 골반뼈가 부러진 뒤로 내내 방에만 누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문을 두드리며 “할머니, 할머니” 하고 말한 뒤, 문에 귀를 바짝 대고 앉았다. 혹시나 소리가 들려오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뒤, 문 너머로 “누구쇼?” 하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저예요, 보통이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역시나 외할머니는 집에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없어 대문을 열 방법이 없었다. 외숙모에게 전화를 거니 좀 떨어진 곳에 나와 있어 금방 돌아갈 수 없다고 해 열쇠 수리공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갔다. 피 같은 1만5000원이 그렇게 사라졌다.

도착한 지 삼십여 분은 지나서야 외할머니 방에 들어갔다. 외할머니는 민들레 홀씨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훅 하고 불면 소리 없이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왔어?” 하고 묻는 외할머니에게 “제가 돈을 벌어가지고 선물을 좀 샀어요”라고 말하며 내복과 베지밀을 내밀었다. 외할머니는 내복을 들며 “아이고 네가 돈을 벌었어? 그럼 그 돈 너나 쓰지 왜 이런 걸 사와” 하고 말하곤 그것을 서랍장에 넣었다. 베지밀은 한쪽에 밀어두었다.

용무가 끝났으니 돌아가야 하는데 일어날 수 없었다. 내가 돌아가면 다시 침묵 속에 남겨질 외할머니 때문이었다. 뭐라도 할 게 없나 생각하다 마침 가방 속에 있던 캠코더가 생각났다. 사긴 했지만 막상 뭘 찍어야 할지 몰라 가방에만 넣고 다니던 캠코더. 그것을 꺼내 외할머니를 찍기로 했다. 어느 날 불어온 바람에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외할머니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었다.

“할머니, 지금 비디오 찍을 거예요.” 내가 말하자 “왜 이런 숭한 노인네를 찍어. 예쁜 거 찍어” 하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사실 앉아 있는 게 고작이라 피할 방법도 없었다.

“할머니. 말 좀 해보세요.” “말은 무슨 말. 할 말 없어.” “밖에는 벌써 봄이 왔어요.” “그래? 벌써?” “버스 타고 오는데 개나리도 펴 있었어요.” “세상에, 꽃이 피었단 말이여?” “봄이에요.” “그러게, 봄이네.” 외할머니는 시종일관 비슷한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나는 몰랐지, 방에만 있어서.” 외할머니 방에서 보이는 창으론 맞은편 건물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종일 같은 풍경만 바라보며 외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알 수 없었다.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해 여름 외할머니는 그대로 일어나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개나리꽃이라도 좀 찍어 보여드릴 걸 하고 내내 생각했다.

몇해 지나 어머니에게 그때의 영상을 보여주었다. 화면 속 외할머니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우리를 향해 “꽃이 피었단 말이여?” 하고 물어왔다. 어머니는 웃는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다음부터는 유료 상영이라고 하자 “이젠 안 볼 거야”라고 말했다. 내가 선물한 내복은 포장을 뜯지도 않은 채 서랍장에 고스란히 넣어져 있었다고 했다. 베지밀은 다 드셨다는 걸 보면 좋아하긴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좀체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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