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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16 20:17 수정 : 2018.05.16 20:23

[ESC] 김홍민의 탐정놀이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주말에는 어디로 놀러 가면 좋을지 알아보다가 자주 마주했던 연관 검색어가 ‘봄꽃 축제’다. 아침저녁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들은 속절없이 지나가 버릴 테니 바빠도 봄의 꽃구경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는 심리에서 비롯된 결과일 거라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봄꽃 축제’라는 이름이 붙어 있으면 덮어놓고 열심히 구경하러 갔으니까. 태안 세계튤립축제, 순천만 국가정원 봄꽃축제, 아침고요수목원 봄나들이 봄꽃축제는 물론이고 고양국제꽃박람회에도 다녀왔다. 평소에는 먹을 수 있는 꽃이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던 인간이 주말마다 꽃구경한답시고 장시간 운전도 마다하지 않는다니, 거참 나 스스로 신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주말마다 멀리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가볼 만한 장소도 한정적이어서 이리저리 추천을 받던 중에 누가 “요즘이라면 문경새재 옛길이 참 좋지”라며 ‘무주암’이라는 곳의 사진을 보내줬는데 이게 꽤 흥미로워 보였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 설명이 눈길을 끌었다. 무주암은 누구든지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해 두었는데 길손들이 바위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즐기며 먹고 마신 비용을 알아서 놓고 가도록 했다는 전설이 있단다. 뭔가 재미난 일화가 잔뜩 얽혀 있을 것 같은 바위 아닌가. 서울에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으니 거리도 적당하다.

문경새재 옛길 가보니
무주암이 호젓해 매력적

서울과 부산으로 이어진 영남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문경새재는 과거시험을 보는 수험생과 공무를 수행하는 관리들이 주로 이용했다. 일본을 내왕한 조선통신사의 기록을 모은 <해행총재>에도 문경새재에 관한 언급이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조선통신사를 따라온 일본의 관리들도 문경새재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을까. 찾아보니 과연, 에도 시대의 기이한 일을 모아놓은 네기시 야스모리의 저서 <미미부쿠로>에 ‘홀로 길을 헤매던 자가 아귀에 씌웠는데 씐 장소가 무주암이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내가 굳이 <미미부쿠로>까지 뒤져볼 생각을 한 까닭은 마침 관련한 책을 편집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새재’는 날아다니는 새와 넘어 다니는 고개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다. 한자로 표기하면 ‘조령’(鳥嶺), ‘새들도 넘기 힘든 고개’를 뜻한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서 걸어보니 전혀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흔히 올레길이라고 부르는 정도의 산책로여서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슬렁슬렁 오가는 상춘객이 여럿 눈에 띄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다. 왼쪽으로 펼쳐진 계곡에서는 맑은 물이 콸콸 흘렀고 파란 하늘 아래 만개한 꽃들이 길을 수놓았다. 문경새재 초입에 차를 세우고 한 시간쯤 걷다가 오른쪽 산자락에서 무주암으로 향하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의 바위까지는 백 미터가량 위로 올라가야 했다. 바위는 어른 스무 명이 앉아서 한꺼번에 도시락을 펼쳐놓아도 될 만한 크기였다. 바위 앞에 세워진 입석에 한자로‘ 無主巖’(무주암. 주인 없는 바위)이라 적혀 있었다.

<미미부쿠로>에 기록된 인물의 이름은 후사고로, 이자는 조선통신사를 따라온 일본의 칙사쯤 되는 듯하다. 그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의 문물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아 왔기에 조선말에 능통하고 지리에도 밝았다. 아마도 그런 자신감으로 인해 방심했던 것이리라. 조선 숙종 41년 5월의 어느 날, 후사고로는 고개를 넘던 도중 낙오하게 된다.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일행을 놓쳐버린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깜짝 놀란 그가 정신없이 발을 움직였지만 스스로 훤하다고 자신했던 길은 나타나지 않고 어딘지 모를 숲속에 갇힌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그럴수록 마음은 급해졌다. 숨이 가빠 목에서 히익히익 바람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달리던 후사고로는 마침내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일단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위를 가늠한 후에 움직이자고 생각했다.

후사고로는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바위에 올라 등에 멘 지게를 풀고 지친 다리를 주물렀다. 그때 ‘꼬르르르르르륵’하고 막혔던 경사로의 물이 한꺼번에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엄청난 허기가 몰려왔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저녁밥을 충분히 먹었는데. 문헌에 따르면 후사고로가 오른 바위의 이름이 바로 무주암이었다고 한다. 어둑어둑한 가운데서도 능이버섯이 눈에 들어왔다. 버섯들은 마치 누군가가 두고 있던 오목처럼 가로로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그 무렵에는 이상하고 자시고를 따질 여유가 없었다고 한다. 문경의 능이버섯은 잘근잘근 씹으면 고기 맛이 날 만큼 식감이 좋기로 유명하다. 그는 비상용으로 챙겨둔 소금을 살짝 쳐서 허겁지겁 몽땅 먹어치웠다. 신선하고 마침맞게 짭조름한 음식이 들어가자 배 속이 든든해지고 기운도 돌아왔다.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보름달이 떠 있었다. 아까까지 헤매던 길이 이제는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채비하고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쯤 지났을까. 달빛을 받아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를 무심코 쳐다보던 후사고로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머리 모양의 그림자 두 개가 나란히 보였던 것이다. 어라. 어째서 몸은 하나인데 머리는 두 개일꼬. 그 순간 ‘꼬르르르르르륵’하고 어처구니없이 성대한 소리가 배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쳤다. 머리가 핑 돌았다. 후사고로는 무아몽중의 상태로 계곡에 뛰어들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계곡물을 전부 때려 마실 듯한 기세였다.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이토록 지독한 배고픔은 지금껏 경험한 적이 없다. 아까의 허기와 지금의 허기는 자연 발생적인 생리현상이 아닌 듯한데, 생리현상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선시대 일본인 기록도 있는 곳
그 기록은 무주암 아귀 얘기

당시의 후사고로가 정확한 명칭까지 떠올리진 못했겠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 대로 그는 아귀에 씐 것이라고, 네기시 야스모리는 적어 놓았다. 아귀란 먹지 못하여 늘 굶주린 상태로 있는 귀신인데 이것에 씌면 갑자기 심한 공복을 느낀다고 한다. 다행이라고 할지 후사고로는 다른 건 몰라도 배짱만큼은 두둑한 남자였다. 그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아귀의 머리로 추정되는 그림자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당신, 혹시 먹지 못해 죽은 귀신인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두 개의 머리 그림자 가운데 하나가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후사고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등골이 서늘했다. 말로만 듣던 귀신에 씐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로소 실감했다. 그러나 내친김이었다. 다시 물었다. “왜 내 몸에 붙은 거요?” 이번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뭐야, 이 귀신은 ‘예,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에만 반응하는 건가. 꽤 긴 시간에 걸쳐 집요하게 탐문한 끝에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애당초 배가 고프다고 능이버섯을 주워 먹은 게 화근이었다. 무주암에서는 먹은 만큼의 비용을 함에 넣지 않으면 그 비용을 치를 때까지 귀신에 씌고 만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되돌아가 셈을 치르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다. 더 지체해서는 곤란하다. 일본으로 돌아갈 때 이 길을 다시 지날 테니 그때 계산하면 되지 않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아귀도 동의해 주었다. 단, 확실하게 셈을 치르는 순간까지는 열심히 먹어줘야 한다. 이 귀신은 ‘잘 먹어주지 않으면 인간을 배고프게 만든다’는 점 외에 이렇다 할 해는 끼치지 않는 듯했다. 마치 돌아서면 배고프다고 징징거리는 어린아이 같다. 그렇게 생각하니 별로 무섭다는 기분도 들지 않았다.

“어이, 귀신. 내가 돌아가는 길에 셈을 치르겠다고 약조했으니 너도 한 가지 약속해다오. 주위에 사람이 있을 때는 섣불리 모습을 보이면 안 돼. 그림자라 하더라도 불쑥불쑥 머리를 내밀어서는 곤란하다고. 알았지? 그리만 해 준다면 나도 열심히 먹어 줄 테니까.” 아귀는 건방지게도 한참이나 뜸을 들이고 나서 어느 모로 보나 마지못해서 한다는 듯이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후사고로가 무사히 일행과 합류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동안 그림자의 머리가 두 개로 보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후사고로는 칙사로서 조선의 대신들로부터 연일 만찬을 대접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원하기만 하면 뭐든 먹을 수 있으니 후사고로의 배가 꼴사납게 꼬르륵거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이 녀석, 만족하고 어디론가 사라진 게 아닐까. 어느 날은 측간에 가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치 여봐란듯이 발치에 머리 그림자가 쓱 나타났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래, 그래, 알았다.

한 달여 일정은 빠르게 지나갔다. 후사고로는 양국 간의 수교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자부심을 안고 귀갓길에 올랐다. 올 때는 조선통신사와 함께였지만 떠날 때는 혼자였다. 그동안의 냉랭했던 기류와 달리 이번에는 모처럼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고 깜짝 놀랄 만한 산해진미도 원 없이 먹을 수 있어서 뿌듯했다. 후사고로는 마지막으로 아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문경새재로 접어들었다. 마침 지난번처럼 동그란 달이 하늘 높이 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신의 그림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검은 뭉게구름 같은 형태의 어두움만 가득했던 것이다. 이건 뭘까 하고 생각하다가 “이봐” 하고 아귀를 불러 보았다. 그랬더니 후사고로의 발치에서 어둠이 끄덕끄덕 움직이는 게 아닌가. 아귀의 머리다. 근데 어째서 그림자의 지름이 두 길이나 될 정도로 커진 걸까.

아귀에게 홀린 일본인
귀신을 비만으로 만든 사연

잠시 생각에 잠겼던 후사고로는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귀는 살이 찐 것이다. 매일 매일 대접받은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으니 당연히 살이 찔 수밖에. 그러자 우스운 와중에도 걱정이 되었다. 제아무리 귀신이라 한들 초고도비만이 건강에 좋을 리 없다. 이대로라면 다른 사람에게 씔 때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살을 빼게 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나는 당시에도 다이어트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인간이 귀신의 비만을 걱정한다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일인지 고개가 갸웃거려졌지만, 뭐 그건 대충 넘어가도록 하자. 왜냐면 나에게 주어진 지면이 슬슬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사연을 작가 미야베 미유키가 소설 <삼귀>에 소상히 적어두었으니 궁금하다는 형제자매님들은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다.

아울러 이 글을 읽고 문경새재에 갈 마음이 생겼다면 초입에서 파는 능이버섯을 꼭 구입하시라 진지하게 권하고 싶다. 기름을 두른 팬에 살짝 볶은 후에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해서 먹어도 훌륭한 맛이 난다. “고기를 씹는 것 같다니까요”라는 파는 이의 홍보가 거짓이 아니더라니까.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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