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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23 20:24 수정 : 2018.06.18 13:54

[ESC] 보통의 디저트

티라미수는 에스프레소를 적신 빵에 마스카포네치즈로 만든 무스를 올리고 코코아 파우더를 뿌린 치즈케이크로, 이탈리아의 전통 디저트다. 내가 이것을 처음 먹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십여년 전, 이탈리아 로마 변두리 어느 카페에서였다. 막 울고 싶던 참이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에 간 것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부모님의 명령 때문이었다. 베네딕토 1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어 바티칸에서 첫 미사를 집전하니 그 미사에 참석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교도나 다름없는 내가 가야했던 이유는, 암 수술 후 요양 중이던 아버지가 거동이 불편한 탓이었다.

여행 일정은 4박5일이면 충분하지 않겠느냐고 부모님이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답한 뒤 귀국일이 정해지지 않은 유효기간 여섯 달짜리 항공권을 끊었다. 충분한지 아닌지는 가서 판단할 심산이었다. 별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다. 배낭엔 옷 몇 벌과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만 챙겨 넣었다. 가진 책 중 가장 두꺼워 쉬엄쉬엄 읽기 좋겠다 싶었고, 여차하면 베개 대신 사용할 요량이었다. 가진 돈을 털어 자전거도 한 대 샀다. 부모님이 주신 돈은 딱 4박5일짜리라 자전거를 끌고 되는 대로 다니려고 산 것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들키면 안 되니 자전거는 친구네 집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도착한 이탈리아. 짐을 찾아 분해한 자전거를 조립하던 나는 절망에 빠졌다. 자전거를 비행기로 옮길 때는 기압 변화로 바퀴가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바퀴의 바람을 빼고 싣는다. 하여 나는 공항에서 바람을 넣을 요량으로 휴대용 펌프를 가져갔는데, 막상 조립해 바람을 넣으려고 하니 펌프와 바퀴가 호환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국제공항 한 켠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조용히, 아주 조용히 좌절했다.

어쩔 수 없이 뜨거운 태양이 작열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스팔트 위를 자전거를 끌며 천천히 걸었다. 옆으로는 연신 차들이 ‘쌩’하는 소리를 내며 로마를 향해 달렸다. 나는 가끔 나타나는 표지판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 때를 빼곤 줄곧 머리를 처박고 자전거를 끌었다. 스마트폰도 없던 때라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불안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향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와 닿지 않았는데, 그 말이 사실이길 간절히 바라고 바라며 걸었다.

4월이었는데도 태양 빛은 이해할 수 없이 강했다. 이탈리아의 오존층은 이미 모두 파괴된 게 아닌가 싶은 강렬함이었다. 게다가 기온은 높고, 짐도 무거워 온몸은 땀범벅이 된 채였다. 번뜩 배낭 속 <모비딕>이 떠올랐다.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고민했다. 과연, 앞으로 여행 중 정말 <모비딕>을 읽긴 할까? 꼭 <모비딕>이 아니더라도 베개로 쓸 만한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읽은 거라곤 첫 페이지 첫 문장 ‘나는 이스마엘’ 뿐이지만, 안 읽어도 괜찮지 않을까? 등등. 몇 대인가, 차가 다시 쓩 소리를 내며 지나치고 난 뒤, 나는 배낭에서 책을 꺼내 길가에 보이는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지나온 길 내내 고통 받은 것이 모두 그 책 때문인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실제로는 내가 멍청해서 그런 거지만, 뭐라도 좋으니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그래서, 티라미수를 먹었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숟가락을 들어 티라미수를 떠먹는 나를 보며 카페 주인은 싱글싱글 웃으며 뭐라 뭐라 말했다.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했다. 여전히 못 알아들으니 손으로 바퀴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설마 놀리는 것일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고 근처 주유소에서 바람을 넣어주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얘기였다. 덕분에 나는 자전거에 바람을 넣고, 다시 또 한 시간을 넘게 달려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밤새 몸살로 앓아누웠지만.

티라미수는 이탈리아어로 ‘나를 끌어 올린다’는 말로, 의역하자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이다. 그때는 어원 같은 것은 몰랐지만, 그때의 티라미수는 확실히 나를 구원해 주었다. 솔직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미사보다도 더 감동적인 맛이었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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