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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06 20:47 수정 : 2018.06.18 13:53

[ESC] 보통의 디저트

초등학교 1학년 때 피아노학원을 다녔다. 또래 남자 아이들은 보통 주산학원이나 속셈학원을 다녔지만 나는 피아노를 배웠다. 막상 집에 피아노가 없는데도 그랬다. 어머니의 바람이었다. 한 평이 좀 넘는 방바닥을 걸레로 훔치는 어머니를 보며 ‘어차피 엄마는 내가 피아노 치는 것을 듣지 못할 텐데’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언젠가 피아노를 둘 수 있을 정도의 넓은 집으로 이사해 내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소파에 앉아 흐뭇하게 바라보는 미래를 꿈꾸셨던 게 아닐까. 매주 주택복권을 한 장 사 추첨 방송을 보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언제나 꽝이었지만.

학원에 가야 할 시간이 되면 선생님이 집까지 찾아왔다. 학원이 멀었던 것은 아니다. 걸어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나 찻길을 하나 건너야만 했는데 그 직전 해에 그 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일로 한 달 넘게 입원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에게 트라우마가 남은 것이다. 어머니는 원장님에게 등록을 하게 되면 매일 데리러 와 줄 수 있느냐 문의를 했고, 덕분에 애꿎은 선생님이 매번 나를 데리러 와야만 했다.

등원을 도와주는 선생님은 긴 머리에 좋은 향기가 나고, 말이 없는 분이었다. 정말이지 말이 없었다. 오래된 일이라 기억 자체가 흐릿하지만 무언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전혀 없다. 선생님이 부모님의 방앗간 문을 열고 가볍게 목례를 하면, 내가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침묵을 유지하며 길을 걷었다. 문제의 찻길도 조용히 건넜다. 이윽고 번데기를 파는 노점을 지나쳐 학원에 도착했다. 선생님은 그사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을 하면 지는 게임을 하는 것만 같았다. 게임의 종료를 알리는 것은 번데기 노점에서 풍겨오는 번데기 냄새였다.

번데기는 미지의 음식이었다. 슬쩍 곁눈질로 보면 영락없는 벌레로 만든 죽처럼 보였다. ‘맛있을까?’라는 생각 이전에 ‘음식인가?’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그런 중에 냄새를 맡으면 혼란이 더해졌다. 여덟살 인생에 처음 맡는 종류의 것인데, 너무나 고소했다. 벌레를 삶는 노점인데 깨를 짜는 기름집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금기를 목격한 것만 같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왠지 금기를 어기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다.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선생님의 손을 잡고 있었고, 선생님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가 나를 옭아맸다.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번데기 냄새와 이성을 다잡게 하는 선생님의 향기 사이에서 나는 갈팡질팡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의 손을 잡고 묵묵히 학원으로 향하던 길. 선생님이 공중전화기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내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은 뒤,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누구에게 거는 것인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선생님은 내게 등을 돌린 채 들리지 않는 소리로 상대와 대화를 나눴다. 아니, 주로 듣기만 해 대화라고 하기도 뭐했다. 언제나처럼 선생님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 모습을 내내 바라보았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선생님은 조금 슬퍼 보였다. 이윽고 통화가 끝난 뒤, 선생님은 “가자”라고 말하며 내 손을 잡았다. 당연히 무슨 일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묻지 못했다. 이내 번데기 노점을 지나 학원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유독 길게만 느껴진 길이었다.

얼마 뒤 선생님은 학원을 그만두었다. 분명 그날 무슨 일이 있던 것이다. 원장님은 새로운 선생님을 붙여주지 못했고 결국 나는 혼자서 학원을 오가게 됐다. 어머니는 매번 집을 나서는 내게 “길 조심해”라고 말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언제나 둘이 걷던 길을 혼자 걷는 것만이 좀 어색할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번데기를 사 먹었다. 더이상 내 손을 잡아주던 선생님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즈음에는 이미 선생님에 대해선 완전히 잊은 채였다.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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