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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10.05 10:40 수정 : 2018.10.05 21:08

그림 김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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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보통의 디저트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공립이면서 시범학교인가 뭔가여서 매우 자유분방한 곳이었다. 우선 O교시가 없었다. 덕분에 초등학생들과 같이 등교를 했다. 야간 자율학습(야자)도 없었다. 중학생들과 같이 하교했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두발 자유여서, 헤어 무스(그리운 이름)를 바르거나 염색을 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해 학교 앞 골목에 세워두는 친구들도 더러 있었고, 일 년에 한두 번 선생님과 학생 간의 폭행 사건이 벌어졌으며, 졸업하기 전엔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에 분노한 학생이 한 개 층의 창문 유리를 모조리 깨버리기도 했다.

“부는 세습되는 거야.”

고등학교 입학 첫날. 담임 선생님은 말했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너희 부모님이 곧 너희의 미래 모습이야.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모습을 벗어나기 힘들어.” 교실 안을 가득 메우던 정적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의 부모님은 작은 방앗간을 운영하고 있었고, 형편은 좋지 않았다. 나중에 사귀게 된 친구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놀러 간 친구 집에서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잠든 친구의 아버지를 보기도 했고, 어머니가 가출해 언제나 쉰내 나는 교복을 입고 다니는 친구도 있었으며, 양친을 두들겨 패는 친구도 있었다. 놀랍지 않았다. 도리어 아파트에 살며, 자기 방이 있고, 부모님이 상냥한 친구의 집에 갔을 때가 더 충격적이었다.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공부해. 이 동네를 벗어나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선생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웃지 못했다. 저마다 자신의 미래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머릿속엔 신학기의 흥분은 사라지고 미래에 대한 공포가 자리 잡았다. 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밤을 새워 공부해 본 첫 중간고사에서 수학 15점을 맞는 바람에 금세 포기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뒤, 쉬는 시간이면 복도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아 있곤 했다.

하늘을 보기 위해서였다. 마침 교실이 남향이라 복도에 앉으면 환한 볕이 복도에 내리쬐었고, 그게 좋았다.

공부는 쭉 안 했다. 미래가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년의 시간이 지난 만큼 두려움도 옅어졌을 뿐이다. ‘우리 엄마 아빠는 부자는 아니지만 사이가 좋으니까 그렇게 살 수 있다면 뭐’하는 식이었다.

“자퇴하는 게 어떠니?”

목민심서를 읽고 독후감을 두 줄만 써낸 날, 2학년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싫어요”라고 답하자 선생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너는 공교육에 맞지 않아.” 그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나와야 할 것만 같았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의 예언도 새삼 떠올랐다.

“왜 맨날 여기 있어?”

그날도 복도에 앉아 있는데 1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던 여자아이가 물었다. 쉬는 시간이면 전여옥의 <간절히, 두려움 없이>를 읽는 아이였다. “그냥”이라고 답하니, “교실이 싫어?”하고 되물었다. “넌 좋아?”하고 물으니 “복도 보다는”이라고 답했다. 잠시 뒤, “이거 마실래?”하며 아이는 내게 ‘스콜’을 내밀었다. 매점에서 200원인가에 팔던 종이팩에 담긴 음료수였다. 잠자코 받아든 뒤 의자에 앉은 채 마셨다. “나는 이 동네를 벗어날 거야.” 창밖으로 비추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아이는 말했다. 1학년 담임 선생의 말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너도 나만큼 공부 못하잖아’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간절히, 두려움 없는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단지 표정만은 아니었는지 여자아이는 졸업 후 관련 학과를 나와 스튜어디스가 되어 동네를 떠났다. 내게 자퇴를 권유했던 선생님은 그해 여름방학이 끝나고 사직한 뒤 한국을 떠나 이민을 갔다. 나는 재수를 했고, 운 좋게 대학에 들어가 회사에 입사하며 동네를 떠났다. 고1 담임 선생님은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며 저주를 퍼붓고 있겠지. 덕분에 동네를 벗어났다는 생각도 들지만, 감사하지는 않다. 학생들이 간절함도, 두려움도 필요 없이 마냥 하늘을 바라보며 스콜이나 마실 수 있는 사회를 만들지 못한 주제에 할 소리가 아니니까.

글·그림 김보통(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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