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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09 19:52 수정 : 2019.01.09 19:57

김홍민의 탐정놀이

일러스트 이민혜
1990년 무렵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야반도주하다시피 고향인 충청남도 금산으로 내려가 고모할머니 댁에 얹혀살았다. 나는 각 학년이 기껏해야 백 명 남짓한 작은 중학교로 전학했다. 대부분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 도시로 떠나면서 아이들도 거의 남지 않게 된 탓이다. 학교를 옮기고 한 달쯤 지났을까, 나는 집 근처에 있는 놀이터에서 신지라는 여자아이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같은 학년이니까 무심코 스쳤을지도 모르지만 ‘신지’라는 이름을 인식하고 대화를 나눈 적이 그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다. 다만 만나게 된 상황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날 신지는 같은 반 아이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아니, 집단으로 구타당한 후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그네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 사업 실패로 야반도주
작은 촌 학교로 전학

신지는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작은 편이었다.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또렷하진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잘 조화를 이루어 ‘이대로 자라면 틀림없이 미인이 되겠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성적도 톱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다른 반이었던 나에게까지 그런 소문이 들릴 정도로 따돌림을 당했다. 이유는 ‘협동심 부족’이라고 해야 하나. 오만하고 주위 사람들을 바보 취급한다는 평을 듣는 모양이었다. 다가가 보니 신지의 무릎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본인은 아는지 모르는지 닦을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 표정에서 어딘가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육상부 에이스인 현수가 신지에게 들이댔다가 보기 좋게 차였다는 소문을 며칠 전에 들은 기억도 난다. 나는 근처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다가 휴지에 묻혀 상처를 닦아 주었다. “아프지 않아?”라고 물었더니 “별로”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머쓱하긴 했지만.

그 뒤로 며칠 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확실히 신지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어울리지 못했다기보다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일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웃지도 않았다. 말도 거의 하지 않았다. 시선은 내내 아래를 향했고 표정 같은 것은 없었다. 주위의 여자아이들 대부분 선생님의 눈을 피해 치마 길이를 짧게 하거나 머리 색깔을 살짝살짝 바꾸는 데 비하면 신지는 언제나 단정하게 기른 머리에 교칙대로의 치마 길이를 고수했다. 그런 모습으로 마치 배가 지나다니지 않는 바다의 등대처럼 늘 혼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책을 읽었다. 혹은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몸이 약해서 체육시간에는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수업이 끝나면 항상 급한 볼일이 있다는 듯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곧장 가는 걸까. 어쩐지 아닐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나는 충동적으로 신지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딱히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신지 같은 아이가 집으로 가지 않으면 과연 어디로 갈지 궁금했을 따름이다. 신지는 길에서도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양쪽 어깨에 메고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나도 평범하게 뒤따라 걸을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당골숲 쉼터’라 불리는 근린공원이었다. 지역민들이 쉴 수 있도록 조성된 곳인데 숲길이 빙글빙글 돌며 나 있고 중심부에 당골숲을 상징하는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가끔 조깅하는 사람들만 이용할 뿐인 장소였다.

이런 곳에 뭐 하러 왔을까. 신지는 좁은 산책로를 올라가 언덕 꼭대기로 나아갔다. 예의 구조물 주위로 나무가 심겨 있었다. 벚나무였다면 꽃놀이 명소가 됐을 텐데, 담당 공무원에게 그런 센스는 없었는지 칙칙한 상록수뿐이다. 신지는 언덕 가운데 있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 나는 그 등대 같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책가방을 연 신지가 스케치북과 필통을 꺼냈다. 그림을 그리려는 건가. 휴일이라면 몰라도 평일의 이런 시간대에 공원을 찾는 사람은 적다. 실제로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다. 게다가 이 공원은 치안이 좋지 않다. 얼마 전에도 이곳에서 조깅하던 젊은 여성이 괴한의 습격을 받았다는 뉴스가 지역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아무리 대낮이라고 해도 태연하게 앉아 그림을 그리다니 대담하다고 할까. 하긴 이 정도 근성이 있으니까 왕따를 당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거겠지. 나는 잠시 신지를 지켜보았다. 늘 꼿꼿하기만 하던 모습은 어느새 숲의 공기와 조화된 듯 보였다. 이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한다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의외로 날씨가 쌀쌀하다고 인식한 순간, 난데없이 콧속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재채기가 튀어나왔다. 신지가 앉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듯이 놀라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한 손으로 콧물을 닦다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신지에게 다가갔다. “저기, 나 홍민이야, 알지? 일전에 놀이터.” 놀이터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을 할 생각으로 약간 머리를 기울였는데 스케치북이 눈이 들어왔다. 공원의 풍경이었다. 나는 솔직하게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와! 잘 그렸네.”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 돌아왔다. “고마워.” 신지가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에게 놀림당하는 예쁜 아이
함께 그림 그리며 친구 돼

다음 날. 나는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 활동을 마치자마자 공원으로 달려갔다. 신지는 어제와 똑같은 장소에 있었다. 언덕 위 광장 벤치에 걸터앉아 스케치북을 펼치고 그림을 그렸다. 어제, 나도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을 때 신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우리는 만났다. 나란히 앉아서 그림을 그렸다. 하긴 내 실력으로 그림을 그렸다니 당치도 않다. 나는 신지의 그림을 옆에서 흉내 냈다. 그러면 신지가 가만히 들여다보며 음영을 주는 기술이나 질감을 표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에 따라 내 그림도 조금씩 나아졌다. 어째서인지 신지의 설명은 이해하기가 쉬웠다. 뭔가를 배우는 데 늦되기 일쑤였던 나로서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겨울방학을 일주일 앞두고 묘한 일이 벌어졌다. 신지의 반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 급식비를 반장이 걷었는데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마치고 교실로 돌아와 보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더란다. 담임선생님은 전부 눈 감게 하고 “이제라도 가져간 학생이 조용히 손만 들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며 회유했다. 물론 아무도 손들지 않았다. 사건은 교장 선생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는 짐작 가는 학생을 알려달라고, 이것은 학교의 명예와 관련된 일이니 끝까지 밝히겠노라며 전교생을 상대로 설교했다. 마침내 제보자가 나왔다. 늘 체육수업을 빠지고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신지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허위 제보였다. 나는 끙끙거리며 어렵사리 탐문을 거듭한 끝에 제보의 장본인이 누군지 알아낼 수 있었다. 이름은 제시, 신지와 같은 반인 여자애로 전교에서 유명하다. 눈길을 끄는 외모에다 성적도 출중하여 늘 공주처럼 행동했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다. 부모님도 부자에다 뭐 하나 부족할 게 없는 아이였다. 아쉬운 게 있다면 몇 달 전에 헤어진 남자친구 정도일까. 문제는 그 남자친구가 육상체육부의 에이스인 현수였다는 거다. 그놈이 신지에게 들이댔다가 차인 뒤로 제시는 현수와 헤어졌다. 하지만 제시는 결별의 원인을 지질한 현수가 아니라 신지에게 찾았다. 앙갚음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으리라. 그러고는 줄곧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제시를 찾아가 조심스럽게 타일렀다. 함부로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지만 돌아온 답은 가관이었다. “너야말로 걔랑 어울리는 거 그만둬. 너까지 따돌림당하고 싶어?” 그 아이는 내가 방과 후 신지와 매일 공원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왕따에다 도벽까지 있는 얘랑 사귄다는 소문이 나 봤자 너한테 이로울 게 없을 거야”라고 협박한 이는 최근에 다시 제시와 만나기로 했다는 현수였다.

그날 방과 후, 나는 공원에 갈까 말까 망설였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 이유뿐이었을까. 모두에게 따돌림당하고 있는 신지와 친하다고 소문이 나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봐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런 걸 고민하고 있다니 나는 현수나 제시 못지않게 하찮은 인간이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했다. 마음먹기에 따라 산책 정도는 할 수 있는 날씨였다. 나는 매일 신지와 만나는 시간보다 한 시간쯤 늦게 공원으로 나가보았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기를 바라며. 공원에는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신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신지가 늘 앉던 벤치 위에 스케치북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에 젖어 얼룩덜룩한 종이 위에 그려진 건 풍경이 아니라 초상이었다. 나와 닮은 소년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모함받은 친구 잠깐 멀리해
갑자기 먼 곳으로 간 그 친구 그리워

이튿날 신지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그랬다.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신지의 건강이 나빠져서 큰 병원이 있는 서울로 이사를 간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신지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앓았다.” 어쩐지 신지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그날, 비 맞은 탓 아냐?” 신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날 어디서 이런 물이 들었는지 잘 지지 않는다.” 신지가 분홍 스웨터 앞자락을 내려다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진흙탕 물 같은 게 들려있었다. 신지가 가만히 보조개를 떠올리며 물었다. “이게 무슨 물 같니?” 나는 신지의 스웨터 앞자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내가 그린 초상화를 품에 안았을 때 스케치에서 옮은 물이야.”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날 밤, 나는 자리에 누워서도 같은 생각뿐이었다. 내일 신지네가 이사하는 걸 가 보나 어쩌나. 가면 신지를 보게 될까 어떨까.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 했는데, “허, 참 세상일도…….” 마을 갔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그 집도 말이 아니야, 사내 애 둘 있던 건 어려서 잃어버리고, 이번에는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자식 복이 없을까.” “글쎄 말이지. 이번에는 꽤 여러 날 앓는 걸 약도 변변히 못써 봤다더군. 지금 같아선 완전히 대가 끊긴 셈이지. ……그런데 참, 그 어린 것이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아.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아? 자기가 죽거든 홍민이를 같이 묻어 달라고……. 그리고 마지막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는구먼. 제목이 그 뭐시냐, <사라진 왕국의 성>이라나…….”

<끝>

글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이 콩트는 필자가 독자들이 ‘읽어보고 싶다’는 기분이 들도록 다양한 소설을 색다르게 소개하는 방식인 ‘궁금증 유발적 소설 각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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