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4.24 18:35 수정 : 2006.04.24 18:35

고교시절 부상 딛고 데뷔 3연승-28K행진
김인식 감독이 캐낸 ‘인천바다 숨은 진주’

2005년 6월7일 밤, 서울 동대문야구장. 청룡기고교야구 인천 동산고와 성남고의 8강전에서 얼굴에 여드름이 가시지 않은 등번호 21번의 동산고 투수가 관중의 갈채를 받고 있었다. 그는 시속 147㎞에 이르는 빠른 공으로 성남고 강타선을 연신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9회가 끝났을 때 그가 내보낸 주자는 단 2명. 매회 거르지 않고 잡아낸 삼진이 무려 17개였다. ‘한국판 빅 유닛’ 류현진(19·한화). 그가 프로야구 구단 스카우트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린 순간이었다.

류현진은 인천 토박이다. 야구를 처음 접한 것은 꼭 10년 전인 1996년. 아버지 손을 잡고 인천 도원구장을 찾았을 때였다. 야구에 빠진 그는 이듬해 창영초등학교 4학년 때 야구부에 들어갔다. 그를 유난히 예뻐했던 이무일 감독은 그에게 투수를 시켰다.

하지만 고교에 들어가서도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고 2때는 1학년 때 다친 왼쪽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까지 받았다. 그게 전화위복이었다. 류현진은 고교 3년 동안 53.2이닝밖에 던지지 않은 싱싱한 어깨, 그리고 6승1패(평균자책 1.54)의 좋은 성적으로 프로야구 스카우트들의 눈길을 끌었다.

류현진은 연고구단인 에스케이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에스케이는 1차 지명 때 인천고 포수 이재원을 지명했다. 8개 구단과 언론의 관심은 온통 ‘괴물투수’ 한기주(당시 광주동성고)에 쏠렸고, 류현진은 ‘평범한 선수’였을 뿐이었다. 2차 1순위로 한화에 정착한 그는 “처음엔 좀 서운했지만 이젠 한화가 더 좋다”고 웃었다.

한화는 그에게 큰 행운을 안겼다. 한화에는 1차 지명선수 유원상이 있었다. 천안북일고 투수 출신의 유원상은 빠른 공과 유승안 전 한화 감독의 아들이라는 배경으로 입단 때부터 화제를 뿌렸다. 계약금도 류현진보다 3억원이나 많은 5억5천만원이었다. 그러나 김인식 감독은 흙속에 묻힌 진주를 알아봤다. 하와이 전지훈련 때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들쭉날쭉한 유원상보다 왼손에 빠른 공을 가진 류현진을 더 눈여겨 봤다. 그리고 시범경기 부진에도 그를 정규시즌에 선발로 낙점했다.

류현진은 국내 프로야구 사상 두번째로 데뷔 뒤 선발 3연승을 거두며 ‘은혜’에 보답했다. 경기가 없는 24일, 류현진은 대전구장에서 수원으로 이동하는 선수단 버스에 장비를 싣고 있었다. 에이스급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팀의 막내였다. 그는 “요즘 기분은 마치 하늘을 나는 듯하다”고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강속구 왼손투수는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오라”는 메이저리그 격언은 그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류현진은 담담하다. “메이저리그요? 아직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그저 송진우 선배님처럼 오래오래 야구하고 싶어요. 올해는 10승에 신인왕이 목표구요.”

류현진은 “여자친구 사귀는 것보다 야구가 좋다”고 말한다. 야구에 푹 빠진 모습이 마치 10년 전 도원구장을 찾은 ‘소년 류현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