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29 23:22
수정 : 2006.08.3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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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세광중 시절 전국대회에 출전해 연습투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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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꼬마투수, ‘회장님’ 되기까지
빙그레에 발을 들여놓은 게 엊그제였는데 18년이 훌쩍 지났다. 그의 나이도 마흔을 넘겼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그의 모습이 더 빛나보이는 것은 그가 작성한 대기록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성실한 자세와 열정으로 자신을 야구계에 불태워 왔기 때문이다.
충북 증평초등학교 4년 때 교장 선생님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한 그는 세광고 시절인 1982~3년 대붕기 감투상, 황금사자기 우수투수상을 차지하며 일찌감치 ‘재목’으로 성장했다. 동국대에 입학한 뒤에도 대통령배 우수투수상(1984), 추계대회 감투상(1986)을 받았고, 87년엔 타격 3위까지 기록하며 백호기 최우수선수상까지 차지했다.
그리고 프로 첫 무대부터 ‘기록의 사나이’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89년 4월12일 빙그레 시절 대전 롯데전에서 데뷔전 완봉승(프로통산 5번째)을 거둔 것. 이듬해엔 최우수 구원투수상(38세이브포인트·11승7패27세이브)을 탔고, 2년 뒤인 93년 19승으로 최다승 타이틀을 거머쥐며 스타로 떠올랐다. 97년 개인통산 2번째 전 구단 상대 승리, 98년 1000탈삼진(프로통산 5번째), 2000년 5월18일 광주 해태전 노히트노런(프로통산 10번째) 등 그의 기록 행진은 쉴 줄을 몰랐다. 2001년엔 타석에서도 기록을 만들어냈다. 6월3일 청주 엘지전 9회말 1사 2·3루에서 프로통산 첫 투수 대타 끝내기 안타를 쳤다. 마침내 그는 2002년 4월23일 청주 에스케이전에선 147승으로 국내 최다승을 기록한다. 그리고 1만타자 상대투구(2003), 2600이닝 투구(2005), 최고령 완봉승(2005) 등 이제 그가 걸어가는 신기록은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송진우는 “200승은 누구나 달성 가능한 것”이라며 시즌 평균자책 4.0이하를 유지하고 150회 이상을 던지면 쌓이는게 시즌 10승이고, 20년을 던지면 200승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발언 속엔 철저한 자기관리가 몸에 배인 그의 남다른 노력이 숨어있다. 스트레칭 동작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한용덕 한화 투수 코치가 “스물살부터 지금까지 몸무게를 70~73㎏으로 유지할 정도로 자기관리를 잘 하는 선수”라고 칭찬했다. 준비성과 승부욕도 대단하다. 등판 전날이면 상대 타선을 1번부터 9번까지 머리 속으로 떠올리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가 하면, 후배 정민철(한화) 선수가 “골프와 당구를 할 때도 연습스윙을 얼마나 하는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승부 앞에선 프로근성이 자기도 모르게 발휘되곤 한다.
그라운드에서 성실한 모습으로 누구도 쉽게 쫓아오지 못할 자취를 남기면서도, 야구장 밖에선 동료들의 어려움을 위해 헌신하는 자세 또한 감동적이다. 한국야구위원회와 프로구단들이 방출을 불사하는 강경한 태도에도 꿋꿋하게 버티면서 프로야구선수협회를 태동시켰고, 마침내 2001년 선수협 초대 회장을 맡아 야구 발전과 선수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솔선수범했다. 그 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회장님’이 붙어다녔는데, 야구계 모두가 그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권오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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