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커버스토리] 류현진의 7년6개월
무서운 괴물이자 귀여운 ‘류뚱’, 야구 만담 주인공으로
▶ ‘현진아, 요즘 낙이 없는데 너 보는 맛에 산다.’ 지난 6개월간 일주일에 한번꼴로 경기에 나선 류현진에게 누리꾼들이 자주 달았던 댓글입니다.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으로 세상이 하 수상하고, 살림살이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올 1년 동안 류현진은 우리에게 이런 존재였습니다. 때론 ‘괴물’이고, 때론 ‘류뚱’인 류현진이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류현진의 지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류현진을 위한 시나리오는 완성됐다.’
지난 10월19일 오전, 국내 야구팬들이 한마음으로 응원한 선수가 있다. 미국 프로야구 엘에이(LA) 다저스의 선발투수이자 팀의 에이스인 클레이턴 커쇼였다. 이날 커쇼를 열렬히 응원한 이유는 따로 있다. 커쇼의 활약으로 엘에이가 세인트루이스를 꺾으면, 내셔널리그의 우승팀을 가리는 시리즈 7차전에 류현진이 등판한다. 류현진의 활약으로 7차전 경기를 잡으면, 엘에이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등판 순서상 월드시리즈 3차전에 류현진이 나서면, 우승이 가려지는 최종전 7차전도 류현진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기대에는 이유가 있었다. 류현진은 시리즈 3차전에 출전해 7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승리를 이끌었다.
5차전 선발인 잭 그레인키의 선전으로 극적인 드라마가 만들어지는가 싶었지만, 6차전 선발 커쇼의 패배로 올해 엘에이의 가을야구는 막을 내렸다. 누리꾼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류현진의 선전에 박수를 보냈다. 류현진은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첫번째 선수로 현지에서 예상치 못한 호성적을 거뒀다. 돈 매팅리 감독은 “류현진의 활약이 기대 이상이었다”고 총평했다. 미국 야구를 놀라게 한 류현진은 7년6개월 전에도 한국 야구에 충격파를 일으키며 등장했다.
마침 그때 영화 <괴물>이 개봉했다
류현진은 데뷔전부터 남달랐다. 2006년 4월13일 엘지 트윈스를 잠실 원정경기에서 맞은 한화 이글스는 고졸 신인인 류현진을 선발투수로 내세웠다. 당시 한화에는 확실한 선발투수 3명과 마무리투수가 있었다. 한때 한국 야구를 대표한 송진우, 정민철 선수는 전성기가 지났지만 선발 한자리 정도는 너끈히 차지할 실력이었고, 문동환 선수는 당시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우고 있었다. 류현진은 결국 첫 원정경기인 엘지전에 팀의 4선발로 경기에 나섰다.
류현진은 이 경기에서 말 그대로 ‘사고’를 쳤다. 왼손투수가 시속 151㎞의 강속구를 뿜어대며 7⅓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고, 경기를 승리로 이끌었다. 안타는 단 3개만 내줬고, 삼진은 10개를 뽑아 역대 신인 데뷔전 최다 탈삼진 타이 기록을 달성했다. 인상적인 경기는 데뷔전만이 아니었다. 두번째 선발 경기에서 만난 그해 우승 후보이자 실제 우승팀인 삼성에 6⅔이닝을 1실점으로 막으며 승리했고, 세번째 선발 등판 경기에선 두산 베어스를 만나 삼진 11개를 거두고 1실점 완투승을 거뒀다. 9이닝 동안 안타는 단 3개만 내줬다. 팬들은 ‘괴물 같은 신인’의 탄생에 열광했지만, 아직 누구도 그를 괴물이라고 부르진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류현진의 별명은 ‘아기독수리’였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을 승리로 이끈 류현진
6차전 패배로 엘에이 다저스의
가을 야구는 막을 내렸지만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2006년 한화 이글스 고졸신인으로
처음 마운드에 선 류현진은
데뷔 첫해 신인왕·MVP를 꿰찼다
아기독수리는 괴물이 되었다 신인 선수들이 시즌 초반에 반짝 활약을 하는 경우는 꽤 있다. 낯선 선수가 이전에 보지 못한 동작과 구질로 좋은 공을 던지면 타자들은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원조 아기독수리였던 조규수는 고졸 신인으로 데뷔한 2000년에 첫 선발 경기부터 내리 5경기를 이겨 한달 만에 다승 1위로 치고 나갔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그해 한달이 전부였다. 남은 5달 동안 5승을 추가해 10승으로 시즌을 마감했고, 이후엔 신인 때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류현진은 달랐다. 2006년 전반기 내내 다승 1, 2위를 다투던 투수는 둘 다 한화 소속인 문동환과 류현진이었다. 문동환은 5월 말에 이미 8승을 거두는 놀라운 페이스로 승수를 쌓아 나갔고, 류현진도 뒤지지 않았다. 특히 그해 7월7일 삼성을 상대로 거둔 11승을 데뷔 첫 완봉승으로 장식하며 다승 1위로 치고 나갔다. 그때부턴 류현진의 독주체제였다. 마침 그때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개봉했다. 거침없이 승수를 쌓아 나가던 류현진을 누구도 이제 아기독수리라고 부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독수리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별명은 ‘괴물’이었다. 그해에 류현진은 결국 18승5패, 방어율 2.23, 삼진 204개로 3개 부문에서 모두 1위를 기록하는 ‘트리플 크라운’으로 신인왕과 최우수선수상(MVP)을 모두 거머쥐었다. 한국 프로야구 32년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6년이 지나고 류현진은 엘에이 다저스와 계약을 맺는다. 다저스는 우리 돈으로 280억원이 넘는 2573만달러를 한화 이글스에 지급하며 협상 우선권을 얻었고, 급여는 6년간 3600만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다저스가 메이저리그에서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 총액 6000만달러가 넘는 돈을 썼고, 이에 대한 의견은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분분했다. 당시 미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류현진에 대한 비관론은 상당히 득세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류현진과 비교되는 선수로 윤석민과 김광현이 꼽힌다. 이 두 선수는 두세 시즌 정도 류현진과 비슷하거나 더 나은 성적을 거뒀지만, 데뷔 후 6~7년간의 성적에는 류현진에게 크게 뒤졌다. 특히 이닝수와 삼진수, 승수에서 차이가 났다. 류현진은 2011년 부상으로 126이닝밖에 못 던졌음에도 7년간 평균 181이닝을 던져 윤석민(7년 평균 136이닝), 김광현(6년 평균 120이닝)을 압도했다. 삼진수도 류현진이 7년 평균 177개로 윤석민(108개), 김광현(108개)보다 훨씬 웃돌았다. 역대 선수들로 범위를 넓혀봐도 데뷔 때부터 7년간 류현진만한 성적을 낸 선수는 최동원, 선동열, 정민철 정도다. 이 세 선수들은 7년 평균 180이닝 이상을 던졌고, 13승 이상을 했으며 삼진 140개 이상을 잡았다. 특히 삼진수에서는 류현진이 평균 176개로 최동원(142개), 선동열(159개)을 앞섰다. 그리고 1년 뒤, 류현진은 한화 이글스의 소년 가장이 아닌, 성공한 메이저리거로 자리잡았다. 한국을 비롯해 대만, 일본의 여러 아시아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지만, 실패 사례가 적지 않았다. 일본 야구에서도 한때 최고 선수였던 이가와 게이는 뉴욕 양키스에 화려하게 입단했지만, 데뷔부터 3년간 2승4패, 방어율 6.66으로 부진했다. 일본의 원조 괴물인 마쓰자카 다이스케는 첫해 15승을 거뒀지만, 3년차인 2009년 4승6패, 방어율 5.76의 투수로 추락했다. 류현진은 직구가 시속 140㎞대 중반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다소 느린 편이었고, 구종도 다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달랐다. 류현진의 제구력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정교했고, 직구와 체인지업의 조합은 여전히 위력적이었다. 포수 에이제이(A.J.) 엘리스가 높게 평가하는 ‘위기대응 능력’도 한국에서의 모습 그대로였다. 경기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류현진의 이런 모습들이 잘 드러난다. 류현진은 초구에 스트라이크를 잡는 비율이 높은 공격적인 성향의 투수다. 시즌 초반 류현진이 호투를 거듭하자, 지난 4월21일 볼티모어 타자들은 류현진의 초구를 노렸다. 결국 이 경기에서 류현진은 초구 홈런을 2개나 맞고 6이닝 5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됐다. 다음 경기인 26일 뉴욕 메츠전에서 류현진은 여전히 초구를 스트라이크로 잡았다. 결국 이 경기에서 류현진은 26타자를 맞이해 20타자에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7이닝 1실점으로 승리를 거뒀다. 상대가 초구를 노린다고 피해가지 않고, 더 예리하게 초구를 던지는 것이 류현진의 스타일이다. 류현진은 강한 상대를 맞아도 피해가지 않고, 더 집중한다. 지난 6월30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강타자 체이스 어틀리는 한 경기에서 류현진에게 홈런 2개를 때리며 ‘천적’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날의 경기를 유심히 보면 류현진의 근성이 돋보인다. 1회와 3회 연타석 솔로홈런을 맞은 류현진은 5회에 다시 어틀리를 만났다. 이때 류현진은 변화구도 던지지 않고 묵직한 강속구로 정면 승부했다. 결국 류현진은 공 6개로 어틀리를 삼진으로 잡았다. 류현진은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메이저리그를 개척한 ‘영웅’이라기보단, 이전처럼 태연하게 던지다가 위기 때 집중력을 발휘하고 동료들과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류뚱’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버지의 고집으로 좌완투수로 전향 가족들과 지인들이 전하는 류현진은 어떤 모습일까. 류현진의 아버지 류재천(57)씨와 어머니 박승순(54)씨는 여느 운동선수의 부모와 비슷했다. 기자가 ‘류현진’의 탄생비결을 묻자, 박씨는 “현진이가 잘해준 거지, 부모가 특별히 한 것은 없다”고 답했다. 그래도 부모의 신경은 큰아들보다 막내인 류현진에게 쏠렸다. 운동선수로서 챙겨줘야 할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류현진의 아버지는 두 아들이 어릴 적부터 인천 자택의 마당에서 캐치볼을 했다. 야구에 두각을 나타낸 류현진을 위해 아버지는 마당에 그물을 치고, 작은 야구장처럼 꾸몄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자, 야구부가 있는 창영초등학교에 가서 입단시험을 치렀다. 창영초의 당시 감독은 “당장 전학 오라”고 했고, 류현진은 그 학교의 야구 선수가 됐다. 아버지는 집 마당 ‘미니야구장’ 그물에 조명까지 설치했다. 제법 구색을 갖춘 연습장이 만들어졌다. 류현진의 특이한 점 중의 하나는 공을 던질 때만 왼손을 쓴다는 것이다. 밥을 먹거나, 글을 쓸 때 오른손을 사용하고, 심지어 타격을 할 때도 오른손으로 친다. 타자 중에선 왼손으로 치고, 오른손으로 던지는 선수가 박용택, 손아섭 등으로 몇명 있지만, 투수 중에선 매우 희귀하다. 류현진이 좌투우타 선수가 된 배경에는 아버지 류재천씨의 고집이 있었다. 류씨는 아들이 투수로서 유리한 왼손투수가 되길 바랐다. 그래서 창영초 야구부에 입단할 때도 오른손잡이용 글러브가 아닌, 왼손잡이용 글러브를 사줬다. 사실 류씨의 이런 시도는 야구전문가들 사이에선 ‘도박’에 가깝다고 평가받는다. 선수마다 좌우 근력, 시력 등이 다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왼손투수, 왼손타자를 만들면 성공하기보단, 실패 확률이 높다. 류현진의 경우는 그 도박이 성공했다. 류현진은 인천의 동산중을 거쳐 동산고에 입학했다. 고교 2학년 초반부터 류현진을 맡은 감독이 동산고의 체육선생인 최영환씨였다. 프로야구 원년 삼미 슈퍼스타즈의 포수 출신인 최 전 감독은 전설의 30승 투수 장명부와 배터리를 이뤘던 선수이기도 했다. 인천 동산고에서 만난 최 전 감독은 “현진이는 만날 때부터 체격이나 던지는 공이 남달랐다. 그때도 이미 시속 140㎞가 넘는 공을 던졌다”고 말했다. 또 그는 “현진이에게 주로 멀리던지기와 마운드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부터 십여개씩 던지며 한발씩 마운드로 다가오게끔 하는 훈련을 시켰다. 예전에 장명부 선배에게서 배운 훈련 방식”이라고 전했다. 당시에도 류현진에게는 남다른 점이 있었다. 최 전 감독은 한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우리 팀에 강타자였던 김기태(현재 삼성 라이온즈 선수)와 현진이가 시비가 붙었던 적이 있었어요. 처음엔 티격태격하다가, 분위기 험악해지면서 진짜 싸우려고 하더라고요. 둘 다 몸무게 100㎏ 정도 나가는 거구였죠. 그런데 갑자기 현진이가 웃으면서 ‘기태야 이러지 말자’며 피해가더라고요. 그것 보면서 ‘저놈은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보통 그 나이에 젊은 혈기로 한번 붙을 만도 한데, 현진이가 감정을 조절한 거죠.” 에스케이 와이번스의 지명을 기대했지만… 류현진은 고2 때 큰 수술을 받았다. 뼛조각을 제거하고 인대를 접합하는 이른바 토미존수술이다. 이때부터 1년간 류현진은 지루한 재활에만 매달렸다. 보통 고등학교 야구 선수들은 고2 때의 활약으로 대학 진학과 프로 입단이 결정되지만, 류현진은 그 1년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고3 때 부상에서 돌아온 류현진은 2005년 동산고를 청룡기 야구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럼에도 류현진은 프로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프로팀들이 신인 선수들을 지명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류현진과 그의 가족들은 지역 연고팀인 에스케이 와이번스의 지명을 기대했다. 하지만 에스케이의 선택은 류현진이 아닌 인천고의 포수 이재원이었다. 각 프로팀들이 1차 지명을 모두 마친 뒤, 2차 지명의 첫 선택권을 가진 롯데 자이언츠는 사이드암 투수 나승현을 지명했다. 류현진은 2차 지명에서도 두번째 순번이던 한화 이글스의 낙점을 받았다. 류현진은 이 당시 미니홈피에 ‘갚아주겠다’고 올렸다가,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앞으로 볼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글로 비판하는 것은 정정당당하지 못하다. 갚아줄 거면 실력으로 갚아줘라”는 것이 아버지의 지적이었다. 류현진의 한화행은 많은 팬들이 안타까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류현진이 등판하는 날이면 지독히도 승운이 따르지 않고, 타자들의 배트는 허공을 가르기 일쑤였다. 한화 소속이 아니면 한 시즌 20승, 통산 100승을 달성하고도 남았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하지만 한화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류현진이 있었을까. 쉽게 예단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다. “위기대응 잘하는 선수 아니지만
질책하면 수용 속도 빨랐다”
“쟤가 오늘 등판할 애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장난치기도” 한화 이글스의 소년가장은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처음
메이저리그 개척한 ‘영웅’ 됐지만
실제론 낙천적이고 장난 좋아하는
‘류뚱’의 모습 그대로였다 김인식 위원장은 1995년 오비 베어스 감독 시절부터 믿음과 뚝심의 야구를 보여준 지도자지만, 한화 감독 재직 때 류현진에겐 유독 엄격했다. 김 위원장은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하루는 수비 실책이 나오자 현진이가 표정을 찌푸려 바로 지적한 적이 있다. 처음부터 표정관리나 위기대응을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질책을 하면 받아들이는 속도가 빨랐다”고 말했다. 류현진의 최대 무기이자, 메이저리그에서 최고의 구질로 손꼽힌 체인지업의 탄생도 소속팀 한화의 영향이 컸다. 최근 은퇴한 신경현 전 한화 포수는 “데뷔 당시 체인지업은 제대로 못 던졌고, 스프링캠프와 시즌 초반엔 직구와 커브만으로 타자들을 상대했다”고 말했다. 류현진은 스프링캠프에서 그해에 한화에 복귀한 마무리투수 구대성에게서 체인지업을 배웠다. 구대성 선수는 2010년 8월 은퇴 기자회견에서 “현진이가 2006년 스프링캠프에서 체인지업을 가르쳐달라고 하도 쫓아다녀서 잠시 그립(손동작)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러고서 현진이가 스스로 터득했기 때문에 특별히 전수해줬다고 보긴 어렵다”고 말했다. 신경현씨는 “현진이가 2006년 시즌 중반부터 주무기로 체인지업을 사용했고, 직구와 똑같은 폼과 궤적인 이 구질이 속도는 직구보다 느리고, 타자 앞에서 뚝 떨어지기 때문에 삼진을 유도하기에 최고였다”고 밝혔다. 류현진의 성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특유의 낙천성과 주체할 수 없는 장난기다. 한용덕 전 코치는 이렇게 전한다. “보통 선발투수들은 경기 전후에 굉장히 예민해요. 아무리 어린 신인이어도 선발에겐 모두가 특별히 배려하죠. 더그아웃에 앉을 때도 선발투수는 늘 같은 자리에 앉도록 배려해요. 근데 현진이는 쟤가 오늘 등판할 애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장난을 치고 있다가, 경기에 나가면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며 던져요. 정말 신기한 성격이죠.” 먹방·장난치는 사진은 팬들에게 인기 동갑내기 친구인 오른손투수 김혁민 선수는 류현진과 끊임없이 장난을 치는 사이다. 그는 류현진에 대한 일화를 꺼내면서도, 한국에 오면 이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시즌 때는 현진이 집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경기 끝나면 같이 밥 먹고, 간혹 맥주 마시거나 피시방에 가는 등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놀아요. 틈나면 저를 건드리고, ‘연습 좀 해라’고 구박해요. 사실 현진이도 연습을 많이 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메이저리그 보니까 현진이가 중남미나 흑인 선수들과도 툭툭 건드리며 장난을 많이 치잖아요. 여기 있을 때도 똑같았어요.” 류현진의 장난기는 야구 저널리즘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도 했다. 포털누리집 다음(daum)에서 ‘엠엘비(MLB) 현장’을 연재하는 조미예 기자는 다저스 클럽하우스와 선수대기석의 분위기를 사진으로 전하고 있다. 경기의 주요 국면에 선수들과 감독들의 반응을 사진을 통해 소개하지만, 상당 부분의 내용은 류현진이 동료들과 치는 장난과 우스꽝스러운 표정, 몸짓들로 채워진다. 선수와 코치·감독의 사진을 모아 하나의 유려한 이야기로 뽑는 기사형식은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례다. 야구만담이 펼쳐지는 누리집 ‘엠엘비 파크’에서도 류현진과 관련된 유머가 많다. ‘류현진 멘탈의 비밀’이라면서 한화 이글스 선수들의 수비 실책들을 모아놓은 영상들이 있는가 하면, ‘류현진이 LA갈비집에 와서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해바라기씨를 먹는 류현진의 사진이나 ‘절친’인 후안 우리베와 장난치는 사진들도 상당수다. 한 게시물에선 정색을 하며 ‘류현진이 이기면 밥이 나옵니까, 떡이 나옵니까’라고 묻는다. 상당히 장문인 이 글에서 첫 글자들을 세로로 읽으면 ‘류현진 포시 첫승 축하’가 된다. 전후 사정을 모르고 달린 댓글로 ‘돈 주고도 못 사는 기쁨을 얻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류현진은 새로운 유형의 스포츠 스타이기도 하다. 한 문화평론가는 이렇게 평가했다. “박찬호는 자기 자신에게 철저한 선수였지만, 또 그만큼 예민했던 ‘떨리는 영혼’이었다. 김연아와 박태환은 애국심이 투영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즐기는 신세대 스타였다. 그런데 류현진은 좀 다르다. 야구는 잘하는데 영웅이라기보단, 동네 동생 같은 느낌이다. 인터넷을 봐도 잘하면 같이 좋아하고, 못하면 궁디 팡팡 치며 힘내라고 하는 식이다. 기존에 슈퍼스타나 국가적 영웅을 대하던 모습과 많이 다르고, 수평적으로 좋아한다는 느낌이다.”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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