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11월10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 엘지 트윈스의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9회말 3점짜리 동점 홈런을 터뜨린 이승엽이 양준혁과 기뻐하고 있다. /사진=유튜브 화면 캡처
|
[토요판] ‘내 가슴 속 명승부’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2002년은 여러모로 제게 잊을 수 없는 해입니다. 한국이 월드컵 4강에 진출하기도 했고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제 토크콘서트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지요. 지금은 일반명사처럼 여기저기 사용되는 ‘토크콘서트’란 말은 제가 처음 만든 말입니다. 12월12일부터 시작하는 ‘김제동 토크콘서트’ 많이 보러 와주세요. 2002년은 제 인생의 명승부로 꼽는 야구 경기가 열린 해이기도 합니다. 2002년 11월10일 대구시민구장에서는 삼성 라이온즈와 엘지(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6차전 경기가 열렸습니다. 삼성 라이온즈는 늘 우승 후보로 꼽혔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21년 동안 단 한번도 우승한 적이 없는 팀이기도 합니다. 경북 영천 출신인 저는 삼성 라이온즈 팬입니다. 삼성이 한번도 우승을 못해서 매년 연말에는 술 먹고 울어야 했습니다. 저에게 대구시민운동장은 삼성 팬들이 늘 그러하듯 성지였고 집이었으며 직장이었고 종교시설이었습니다. 그런 삼성에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정말 2002년 11월10일만큼은 달랐습니다. 삼성은 이날 시리즈 전적 3승2패로 앞서고 있었고 엘지를 대구시민운동장으로 불러들여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습니다. 대구 관중들은 초흥분 상태였습니다. 사자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쌍둥이 전사와 전투를 벌일 듯한 로마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대구시민운동장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볼 준비를 마쳤습니다. <윤도현의 러브레터>에 막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던 저는 스케줄상 이날 서울에 있었습니다. 바쁜 일정이었지만 이날만큼은 티브이 앞에서 경기를 챙겨 봤습니다. 질 수도 있으니 소주 한 병을 제 앞에 놓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21년 동안 우승 못한 삼성3승2패 앞선 상태서 대구전
9회말 마지막 공격 앞두고
LG에 6대9로 끌려가는 상황
LG 투수는 ‘야생마’ 이상훈 무사 1·2루에 나온 이승엽
20타수 2안타로 부진하던 시절
“홈런 치면 손에 장 지진다”
친구들 비웃음에도 홈런 확신
결국 손가락 깨물며 오열을… 얼핏 보면 삼성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이날 경기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9회말 삼성은 마지막 공격을 앞두고 6 대 9로 엘지에 3점 뒤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이 경기를 내어준다면 서울로 가는 7차전은 아무래도 엘지에 유리했습니다. 성질 급한 대구의 제 친구들은 미리 서울 숙소를 알아보고 있을 정도로 ‘이번 경기는 끝났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그때 엘지 투수는 막강 마무리투수인 좌완 이상훈이었습니다. 쌍둥이를 태우고 멋지게 달리던 야생마 닮은 투수, 기억나시죠? 제가 삼성 팬이지만 이상훈 선수는 참 대단한 선수입니다. 요즘 말로 ‘넘사벽 마무리투수’입니다. 그런 이상훈을 상대로 과연 삼성 타자들이 역전을 해낼 수 있을까? 솔직히 희망이 안 보였습니다. 김재걸 선수가 타석에 올랐습니다. 중견수 담장 맞고 떨어지는 2루타를 쳐냈습니다. 하마터면 홈런이 될 뻔한 큰 타구였습니다. 이때부터 슬슬 희망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타석에 들어선 브리또가 볼넷을 골라나가 주자가 1·2루에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야생마 이상훈도 슬슬 흔들리는 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타자는 이승엽 선수였습니다. 이때 이승엽은 한국시리즈에서 20타수 2안타로 부진하고 있었습니다. ‘저 인간보다 내가 잘 치겠다’고 욕하는 제 친구의 멱살을 잡고 그 전날 소주잔을 깼던 술기운이 제게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이승엽을 믿었습니다. ‘이승엽이 홈런을 친다’에 제 인생을 걸었습니다. 제 친구는 ‘이승엽이 홈런 치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습니다. 여기저기서 얘기한 적 있지만 이승엽 선수와 저는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저는 대구 야구장에서 가끔 장내 이벤트 사회자를 하는 무명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승엽 선수는 늘 무명인 저에게 먼저 말을 걸어 왔습니다. 밥도 제게 먼저 먹자고 말해주었고, 그날 바로 저녁도 같이 먹었습니다.(돈은 제가 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승엽 선수는 저뿐만 아니라 장내 이름 없는 직원들을 먼저 챙기는 참 인간성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좋은 이승엽 선수가 20타수 2안타로 부진해 욕먹는 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제발 한 방 크게 터뜨리기를 저는 바라고 또 바랐습니다. 야생마가 드디어 공을 던졌습니다. 125㎞ 우측 슬라이드였습니다. ‘딱’ 소리가 났습니다. 공은 우측 담장으로 훌쩍 날아갔습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 친구가 손에 장을 지져야 한다는 것을.(이 친구는 그날 이후 어디에선가 장만 지진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결과는 홈런이었습니다. 3점 동점 홈런! 텔레비전에서 이승엽 선수가 폴짝폴짝 뛰며 대구 구장을 뛰어다니는 게 보였습니다. 브리또를 껴안는 것도 보였습니다. 3루 쪽 관중을 찾아가 두 팔을 들며 환호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패색이 짙던 삼성은 이어 타석에 올라온 마해영이 끝내기 홈런까지 쳐내며 결국 이날 우승을 해버립니다. ‘이마포’라고 기억나십니까. 이승엽과 마해영 선수가 하도 랑데부 홈런을 자주 쳐서 나온 말이었지요. 이날 이마포 한 방으로 삼성은 메이저리그를 포함해 우주 전체에서 가장 극적인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삼성은 21년 만의 한을 풀었고 저도 한을 풀었습니다. 저는 ‘역시 이승엽’이라며 손가락을 깨물며 오열했습니다. 누군가는 드라마라고 이야기했지만, 드라마를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다면 아마 유치하다고 잘렸을 겁니다. ‘21년의 한, 20타수 2안타의 부진’은 이 드라마를 위한 훌륭한 소재였습니다. 이것이 야구이지요. 인간이 집으로 돌아와야 득점이 되는 참 인간적인 경기.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경기. 오심도 경기의 일부로 받아들이지만 고의로 오심하는 경우에는 가차없이 징계를 내리는 공정한 경기. 이것이 야구지요. ‘야구 몰라요’를 외치며 ‘인생 몰라요’를 성찰하게 된 참 멋진 경기였습니다. 훌훌 털고 다시 달리는 멋진 야생마(이상훈)가 있었고, 웅크리고 있다가 한 방을 날리는 사자(이승엽)가 있었으며, 말없던 코끼리(김응용 당시 삼성 감독)는 상대에게 신(김성근 당시 엘지 감독)이라는 호칭을 부여하며 기꺼이 그를 위해 어깨를 내어주었던 경기가 바로 이날의 경기였습니다.
|
김제동 방송인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