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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08 15:30 수정 : 2015.10.08 15:37

[한겨레21] 떠난 사람
뉴욕 양키스 황금기 이끌고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요기 베라,
역설을 통과해 삶의 진실에 이르는 어록 ‘요기즘’으로 미국 야구 아이콘이 된 명민한 포수

23일 타계한 요기 베라. (AP=연합뉴스 자료사진)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요기 베라(Yogi Berra·사진)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혹 요기 베라를 모른다면, 이 말은 어떤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이 말이 처음 세상에 나온 것은, 1973년 여름. 요기 베라가 감독을 맡고 있던 미국 메이저리그의 뉴욕 메츠가 최하위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베라가 곧 해고될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리포터가 물었다. “이제 다 끝난 겁니까, 요기?”

그는 대답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닙니다.” 뉴욕 메츠는 이후 승리를 이어가 그해 지구 우승을 차지했고, 월드시리즈 결승전에 가서야 무릎을 꿇었다.

야구 역사상 월드시리즈 최다 등장

뉴욕 양키스의 전설,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포수, 요기 베라가 지난 9월22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

베라는 야구 역사상 월드시리즈에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이었다. 그가 19년 동안 몸담았던 뉴욕 양키스는 14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10번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다. 베라는 세 차례에 걸쳐 아메리칸리그 MVP 선수로 뽑혔다. 그는 영리한 캐칭, 힘있는 타구, 감독으로서의 리더십, 경기를 통찰하는 능력 등을 두루 갖춘 미국 야구의 아이콘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준 것은 무엇보다 요기 베라라는 인간 자체의 고유함이었다. 그는 문법에 맞지 않는 모호한 말을 자주 했다. 그것은 꼭 짧은 경구처럼 들렸고, 야구를 초월해 삶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을 담고 있었다.

“갈림길을 만나면, 그걸 택하라”(When you come to a fork in the road, take it).

“보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You can observe a lot by watching).

사람들은 그의 어록을 ‘요기즘’(Yogi-ism)이라 불렀고, 이 ‘동어반복’ ‘모순어법’ ‘역설’의 말들은 누구나 아는 격언이 되었다.

베라는 중학교 2학년 중퇴가 학력의 전부였다. 야구 명예의 전당 인터뷰에서 학교 성적은 어땠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크게 좋지는 않았다. 알다시피, 나는 영어의 문법을 조금씩 망가뜨리면서 말한다. 그러려고 의도하는 게 아니다. 그냥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이다.”(<워싱턴포스트>)

그는 자신이 가던 식당이 유명해져서 더 이상 갈 수 없게 되었다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무도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는다. 그곳은 너무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Nobody goes there anymore, It’s too crowded).

‘요기’는 그의 별명이다. 어릴 적 친구들이 영화 속 인도 요가 수행자와 닮았다며 붙인 별명으로, 가족조차 그를 요기로 불렀다고 한다. 어쨌든 ‘요기’는 메이저리그에서 ‘베이브’(베이브 루스)와 함께 가장 유명한 별명이 되었다.

본명은 로런스 피터 베라. 로런스 피터 베라는 1925년 5월12일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북부 출신의 이민자 2세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신문팔이를 했다. 음료수 트럭을 몰았고, 신발공장과 석탄적치장에서 일했다. 그의 평생의 친구인 조 개러지올라(후일 메이저리그의 포수)가 길 건너편에 살았는데, 나머지 시간에는 그를 비롯해 여러 친구들과 야구를 했다.

베라는 양키스의 마이너리그 구단 ‘노퍽 타스’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1년을 보낸 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였던 1944년 해군에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46년 제대 뒤, 뉴욕 양키스의 부름을 받아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첫 홈런을 기록했다.

이후 그는 알려진 것처럼 뛰어난 포수로 성장했다. 그가 훌륭한 선수였다는 사실은 종종 ‘요기즘’의 그늘에 가려지곤 했다.

스포츠 저널리스트 앨런 바라는 2009년 베라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썼다. “다른 어떤 포지션도 그러한 지적 능력과 본능, 그리고 리더십 능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요기는, 가장 힘든 포지션(포수)에서의 가장 훌륭한 선수다.”(<워싱턴포스트>)

중학교 중퇴하고 공장일… 남는 시간에 야구

뉴욕 양키스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베라는 양키스의 황금기를 이끈 팀의 구심점이었다.

첫인상에 베라는 야구선수 같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땅딸막했고, 관중과 상대팀 선수들이 폭소를 터뜨릴 만큼 어색한 달리기 폼을 갖고 있었다. 마이너리그 선수 시절 양키스의 단장은 그가 “실직한 서커스단의 막내” 같아 보였다고 말했다. 그의 외모와 지적 능력은 자주 조롱거리가 되었다. 언론은 그를 야구 백치 천재 증후군, 유인원, 부서진 영어를 쓰는 만화 애호가, 성공한 시골뜨기 등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양손에 배트를 쥐면, 웃음소리는 고요해졌다. 왼손잡이 타자인 베라는 ‘배드볼 히터’로 불렸다. 그는 종종 스트라이크존 바깥으로 들어온 공을 쳐내 홈런을 만들었고, 그럼에도 거의 삼진을 당하지 않았다. 베라에게 최고의 해였던 1950년, 567타수에 삼진은 고작 12번이 전부였다. 그해 그는 경력에서 최고인 0.322의 타율을 기록했다.

베라가 등장하는 야구사의 명장면이 몇 가지 있다. 유명한 장면 중 하나가 1956년 돈 라센의 퍼펙트 경기일 것이다. 1956년 10월8일, 뉴욕 양키스와 당시 최대 라이벌이었던 브루클린 다저스의 경기. 돈 라센은 단 한 명의 다저스 선수도 1루에 접근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 경기는 월드시리즈 역사에서 유일한 무안타 게임으로 남아 있다. 이날의 포수는 베라였다.

“그는 감지하기 힘든 숨은 역할을 했다. 그는 혼잡함 가운데 투수를 리드할 줄 알았고, 모든 타자들의 약점을 알았다. 그는 팀원들에게 영감을 주고 도전의식을 북돋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201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앨런 바라는 이렇게 말했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 걸쳐 양키스는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구를 보여주었다. 비록 그들이 가장 좋은 투수를 가진 적은 없었지만.” 대신 그들에게는 투수를 리드하는 명민한 포수, 베라가 있었다. 당시 양키스의 감독 케이시 스텡겔은 그를 “나의 조감독”으로 부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챔피언 반지 10개를 수집한 선수는 베라뿐이다. 베라는 1965년까지 현역 생활을 하며 2120경기에 나서 타율 0.285(7555타수 2150안타), 358홈런을 기록했다.

1964년 그는 뉴욕 양키스의 감독이 되었고, 팀을 월드시리즈로 이끌었으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패한 뒤 경질됐다. 1965년에는 뉴욕 메츠로 자리를 옮겨 코치 생활을 하다가, 1972년 감독으로 승격됐으나 1975년 다시 경질된다.

그가 친정 양키스로 돌아온 것은 1984년이다. 그러나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고, 경질 과정에서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와의 불화로 1999년까지 무려 14년 동안 양키스와 관련된 일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1986~89년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코치를 마지막으로 그는 지도자 생활에서 물러났다.

월드시리즈 유일 무안타게임의 숨은 ‘조감독’

1972년 베라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그의 등번호 8번은 양키스 구단으로부터 영구 결번됐다. 1999년 스타인브레너와 화해한 뒤, 그는 매년 양키스의 봄철 훈련에 참석했는데 언제나 양키 스타디움의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시간이 흘러, 베라는 그가 야구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젊은이들에게까지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요기즘’의 목록도 다양해졌다. 너무 많은 말들이 ‘요기 베라’의 꼬리표를 달고 나오다보니, 후일 그는 “나는 정말 내가 말했다고 하는 모든 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허튼소리를 통과해 진실에 이르는 ‘요기즘’ 중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다른 사람의 장례식에 꼭 가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은 당신 장례식에 안 갈 거다.”

이로사 객원기자 goorra@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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