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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02 15:25 수정 : 2006.03.02 16:14

인터뷰 중인 이천수. 사진 강창광

이천수, 참 미워할 수 없는 재주꾼이다. 기자들은 축구대표팀의 ‘재간둥이’ 이천수(24·울산)를 볼 때 이런 감정을 느낀다. 거침없이 얘기를 하지만, 그렇다고 허투로 나오는 얘기는 거의 없다. 수 많은 기자들이 짧은 시간 집중적으로 물을 때, 어쩌면 그렇게 빠르게 머리를 굴려 적절한 대답을 해 내는지.

생기발랄한 이천수가 한국축구대표팀의 장기 국외 전지훈련(1.15~2.24)을 거치면서 더욱 자신감 가득찬 표정이다. 그라운드를 톡톡치며 나는듯한 날랜제비 모습의 플레이스타일처럼, 언론과의 대면에서도 총기가 번뜩인다.

28일 오전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대표팀 집단 인터뷰장. 앙골라와의 평가전을 앞둔 선수들은 매우 긴장된 표정이다. 6개의 테이블에 3~4명씩 선수가 앉아 있으면 기자들이 테이블을 찾아가 묻는 인터뷰 방식이다. 이날의 최고 인기선수는 ‘초롱이’ 이영표(29·토트넘). 그러나 국내파 선수로는 이천수가 단연 인기 톱이다. 같은 테이블에 앉았던 선배 최진철(35·전북)이나 유경렬(28·울산)이 이천수 쪽으로 밀려드는 취재진을 보고 머쓱해 한다.

이럴 때는 인터뷰하는 이천수나 선배들 모두 괴롭다. 이천수는 괜히 선배들 앞에서 너무 튀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할 것이고, 선배들은 ‘지옥같은 인터뷰 빨리 끝났으면’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전쟁이다. 대표팀내 경쟁은 그라운드 뿐 아니라 밖에서도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홍명보 코치는 “대표팀 23명 모두가 중요하다. 그러나 운동장에 나가는 것은 11명이다. 그것을 어떻게 하겠느냐? 누구를 위로하고 동정할 것도 없다. 자기가 알아서 삭여야 하고, 실력으로 보여주면서 자리를 찾아야 한다.”

삭막한가? 그렇지 않다. 삶은 그렇게 이뤄지고, 대표선수는 투쟁 속에서 살아 남을 뿐이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진출까지 잘 나가다가, 지난해 여름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2002 한-일월드컵 때는 어려서인지 어떻게 뛰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 뒤 스페인에 진출했고, 성공할 것이라고 호언했지만, 큰 실패를 겪었다. 스페인의 동료 선수들이 멀찍이 서서 나르 보면서 얘기를 할 때는, 나를 놀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운동장에 들어가면 무엇을 하는지 모를 정도였다. 축구선수는 축구만을 생각해야 하는데 축구생각이 잘 안나고 두려웠다.”


“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감 없으니까 베스트 경쟁에 대한 질문이 오면 ‘월드컵 엔트리 23명 안에만 들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지요. 스스로 생각해도 나 자신에게 우습고 미안할 정도였다.”

인터뷰 중인 이천수. 사진 강창광
많은 이들은 지난해 12월말 진행된 K리그 최우수선수 투표함 개봉식장의 이천수가 고개를 숙인 채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모습과, 경쟁자이며 후배인 박주영(21·FC서울)이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느긋하게 있던 장면을 기억한다. 이천수 스스로도 당시 생각을 하면 왜 그렇게 초조해했을까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좌절을 맛본 이천수한테는 국내무대 재기의 보증수표인 최우수선수가 절실했다.

“풀죽었던 이천수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최우수선수 만큼 극적인 요소는 없기 때문이다. 상 받으면 죽어가던 사람도 벌떡 일어나는가? 이천수는 “최우수선수 되고 나서 쉬지 않고 운동했다. 전지훈련 가기 전에 그 만큼 자신 있었다. ‘우승하고 오겠다’고 말했는데, 40여일이 지난 지금 행복하다.” “‘맨날 골대만 맞춘다’라는 소리 들었는데, 이번에 골도 넣고 도움주기도 많이 했다. 욕심부리는 모습도 없어졌다고 그런다. ‘골 넣을 줄 아는 선수’라는 말 들으니까 자신감이 더 커진다.”

아드보카트 감독 부임 초기 대표팀 경기에서 다른 선수들에게 밀렸던 일, 안티 이천수 팬들이 ‘미꾸라지’ ‘싸가지’ ‘욕심쟁이’ 등등 비판의 글을 올린 것도 지금은 옛날 이야기처럼 가물가물하다. “팬들이 많이 달라졌다. 인터넷보면 나에 대한 평들이 좋게 나온다. 정말 요즘은 미칠 정도로 좋다.” 그럼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안티 이천수 팬들한테는 어떤 감정을 가질까? 그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솔직히 저를 잘 모르는 분들이 아는 것처럼 많은 것을 써 놓는 일이 많아요. 사실 지금 저의 기량이 최고는 아닙니다. 한국이 아직 세계 최고는 아니고, 저도 아직 배울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음 배우는 단계이고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제 컨디션 좋아지면 더 좋아질 것입니다.”

섭섭했던 모양이다. “선수란 단점도 있고 장점도 있고, 더욱이 저는 완벽한 선수가 아닌데.” “저 나쁜 사람 아닙니다. (웃으면서) 사회의 적도 아니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시민입니다. 국가대표 선수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합니다. 최선을 다하고 응원하는 팬들을 위해서 죽기살기로 뛸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 이천수 특유의 자신감이 나온다.

“시간이 약입니다. 싫어하는 팬들도 언젠가는 저를 좋아하는 팬들로 만들겁니다. 부정적인 이미지 바뀔 겁니다.” 개인이 자의식을 통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듯이, 시민 또한 백성이나 민초라는 말과는 달리 근대적 각성을 통해 탄생한 새로운 인간형이라고 알고 있다. 사회적으로 해를 끼치지 않는 한(사회의 적이 아닌 한) 인간 행동의 자유는 보장돼야 한다. 물론 이천수가 이런 말들에 대한 역사 사회적 맥락을 잘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이천수는 꽤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드보카트 감독한테 은근히 인정받고 있다는 뉘앙스도 느껴진다. “감독님은 수비를 안하면 경기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공격자도 수비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거기서부터 압박이 들어가야 수비가 편해집니다. 감독님은 수비에서 골 안 먹고 잘 지키면 수비가 아니라 공격수를 칭찬합니다.” 그렇다면 공격수들은 일이 두배로 늘어난 셈인데, 지쳐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 이천수는 “지쳐 쓰러지면 아웃이죠. 그런데 죽어라고 뛰어도 쓰러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하긴 최주영 대표팀 의무팀장은 ‘젊은 피’ 이호(21·울산)와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영표(토트넘) 이천수를 대표팀내 최강체력으로 꼽은 바 있다. 아드보카트 감독의 주문은 구체적이다. “감독님은 현대축구에서 측면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많이 뛰는 곳이고, 힘들기도 합니다. 저한테는 수비 2명의 붙을 때는 패스하고, 1명이 있을 때는 돌파하라고 말합니다.”

왼발 오른발 슈팅도 좋기 때문에 골대 앞에서 슛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크로스의 정확성이다. 대표팀 전지훈련 기간 동안 측면의 이천수가 올려준 공이 중앙의 이동국(포항)한테 맞춤하게 간 적은 거의 없다. 왼쪽 측면의 정경호(광주)나 박주영도 비슷했다. 오죽했으면 이동국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정확한 크로스가 왔으면 좋겠다”고 투덜댔을까? 이 부분에 대한 이천수의 해명을 들어보자.

“동국이 형하고 호흡을 맞춰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전훈 통해 왼쪽 오른쪽에서 크로스 많이 올렸지만 골은 거의 없었습니다. 크로스가 잘못된 점도 있고, 움직임이 잘못된 점도 있다고 봅니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작품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왜 호흡불통이 일어났는가? 이천수는 “서로 주문하는게 다른 것 같다. 저는 한박자 빠른 패스를 문지기 앞쪽에 하는데, 동국이 형은 상대 견제가 워낙심해서 빠르게 침투를 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서로 얘기를 했는데, 동국이 형이 ‘내가 문전으로 들어갈 때는 측면 크로스를 좀 꺾어서 뒤쪽으로 내달라’고 요청했다. 앞으로 그렇게 할 것이다. 또 동국이 형과 같은 선상에 있으면 문지기 앞 쪽으로 크로스를 할 것이다.”

이천수는 “앞으로 두 선수의 호흡이 부족해서 골이 안터졌다는 얘기가 안나오도록 하겠다. 다시는 이런 질문 안받겠다”며 협력 플레이를 통한 공격진의 득점률을 높일 것을 장담했다. 감독은 두 사람의 플레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이천수의 말을 들으면, 세심한 아드보카트 감독은 전방 공격진의 호흡 문제를 선수들 스스로 해결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보인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연습 때 이천수가 문지기 앞쪽으로 크로스를 하면 ‘굿’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이동국한테 정확히 가건 안가건 상관이 없다. 이천수로서는 당연히 그렇게 크로스를 해왔다. 그러나 이견이 생겼고 해법도 찾아냈다. 이천수는 이동국과 호흡을 맞춰 좋은 크로스해서, 좋은 골 나오는 모습을 앞으로 경기에서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3개월 남은 2006 독일월드컵 본선. 이천수의 꿈은 무엇일까? “최대한 협력플레이를 하겠지만, 기회가 되면 골을 넣고 싶어요. 공격수가 골을 넣다보면 성적이 좋을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다는 영광스런 기록을 갖게 되니까요.” 다시 이천수의 욕심이 발동하지만, 그걸 나무랄 수는 없을 것 같다. 2002년 멋 모르고 월드컵 본선 경험했지만, 지금은 그 누구보다도 성숙한 마음가짐으로 독일행 선전을 다짐하고 있다. 유럽 재진출을 위해서는 골을 넣어 상품가치를 더 높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물론 동료한테 더 좋은 기회가 온다면 ‘골 욕심’은 경계해야 한다.

이천수는 “골은 욕심부리면 안됩니다. 반면 기다리면 들어갑니다. 넣겠다고 했다가는 저 또 욕먹을걸요”라며 능숙하게 변명을 한다. 그러나 한번 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단다. 이천수는 축구선수 절정기에 들어와 있다. 칭찬을 하면 더욱 힘을 내는 게 이천수다. 다른 선수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영표는 “월드컵까지 남은 기간 한국 대표팀한테 필요한 것은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칭찬”이라고 말했다. 이영표의 말처럼 기자도 이천수한테 격려의 메시지를 보낸다. 돈도 안드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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